상사병에 며칠 밤잠을 설치다 어쩔 수 없이 산책을 나섰다. 얇아진 옷만큼이나 발걸음도 사뿐사뿐. 이번엔 영진해변과는 반대로 방향을 잡았다. 초저녁도 아닌 오후 2시. 점심으로 닭가슴살을 두 팩이나 먹어서 그런지 새가슴처럼 잔뜩 기대에 부풀어 카메라까지 챙겼다. 뷰파인더에 비친 화창한 봄 세상이란 티 없이 가볍고 끝없이 깊어서 마치 신기루 같다. 건물과 건물, 산과 산, 바다와 수평선, 피사체와 피사체를 나누는 선들은 금방이라도 흐드러질 것처럼 몽글거리지만, 그 간극을 메우는 공기의 질감은 너무도 맑아서 원근감이 선명하다. 가벼운데 깊고, 흐릿한데 선명하다는 이 비논리적인 말보다 봄이라는 세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없다. 어디 사막 위의 오아시스와 황금성은 말이 되는 것일까. 신기루. 마법 같은 이 계절을 포착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안 챙길 수 없었다.
토요일 오후 2시라 그런지 주문진 건어물 시장 길엔 관광버스가 즐비했다. 상인들의 색색 가지 앞치마와 관광객들의 화려한 등산복이 뒤섞여 여기가 건어물을 파는 곳인지, 화훼시장인지 헷갈릴 만큼. 정신없는 그 거리를 피해 건어물시장 뒤편에 있는 수산 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골목골목마다 놓인 테이블에서 회 한 점에 소주 한 잔을 들이켜는 사람들의 표정은 날씨만큼 화창했다. 반대편엔 수조 가득 담긴 생선들과 갑각류들이 뜰채에 낚이는 날을 기다리며 힘없이 얕은 수심을 채우고 있었다. 광어의 피부색만큼이나 짙고 어두운 수조 행렬을 빠져나오면 주문진항이 나온다.
항구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배들은 서로에게 어깨동무한 체 바다의 움직임에 올라타 있었다. 수백 명의 기마부대가 출격을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는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오랜 친구들이 술을 진탕 마신 채 어깨동무하고 2차로 향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울렁울렁. 그중 어떤 배는 녹이 잔뜩 슬어 있었고, 어떤 배는 윤기가 흘렀다. 어떤 배는 두세 명의 선원만 타도 가득 찰 만큼 작았고, 어떤 배는 열 명이 족히 탈만큼 컸다. 분명한 건 그 모두가 누군가의 삶을 책임지는 단단한 터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산에선 부산항을, 강원도에선 주문진항을 걷는 걸 좋아한다. 비좁은 배와 배 사이에서 버거운 유대감과 힘겨운 책임감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겸손해지곤 하니까. 마치 갑작스럽게 집이 가난해졌지만, 끝끝내 버티고 버텨 낸 엄마의 부르튼 손과 아빠의 앙상해진 다리를 볼 때 느껴진 그런 겸손함 말이다. 우리 집은 녹슬고 두세 명만 있어도 가득 찰 만큼 작았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매일같이 출항했었다. 항구에 정박한 저 배들처럼.
항구 끝에 다다랐을 때 주문진 방파제로 빠지는 음습한 길이 나왔다. 불과 몇백 미터 떨어진 곳과는 다르게 사람은 없고 낡은 그물 등의 어업 장비들이 회색빛을 그려 놓고 있었다. 곳곳엔 생선을 담았을 목제 박스와 그물에 연결할 밧줄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배를 수리하거나 조업 준비를 하는 어부 아저씨 아줌마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처음 들어선 길이었고, 낯선 모습에 이끌려 셔터를 마구잡이로 눌렀다. 천천히 걸으며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바다와 인간의 연결고리들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다 보니, 어느새 방파제 앞에 서 있었다. 멀리 보이는 방파제 끝에는 언제나 점처럼 보였던 붉은 등대가 서 있었고, 여기까지 온 김에 가까이 가보자는 마음이 대뜸 생겼다.
뒤늦게 찾아보고 안 사실이지만 주문진 앞바다 전체를 감싸고 있는 방파제 길이는 무려 1km에 달했다. 어쩐지 멀더라. 오후 2시 반 언저리의 뙤약볕은 천천히 사람을 지치게 했다. 가야 할 길보다 돌아갈 길이 조금 더 길어졌을 무렵, 방파제 길과 테트라포드를 구분 짓는 난간에 풀썩 주저앉았다. 산책하며 지나온 수산 시장과 관광객들, 항구와 배들의 뒷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동안 앞으로만 오고 갔었지, 뒤편에 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더불어 언제나 그 속에 내가 놓여 있었지, 멀리서 그 전체를 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발 디딜 틈 없던 거리와 화려했던 관광객 무리는 점처럼 작아서 하나의 면처럼 보였고, 유리창으로 외간을 감싼 수산 시장은 봄 햇살을 반사하며 바다 위로 은은한 금빛을 채색하고 있었다. 주문진항에 정박한 수많은 배들은 녹이 슬었는지, 윤기가 나는지, 작은지, 큰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만큼 멀어져 있었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니 영진해변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깨비 촬영지는 온데간데없고 아름다운 해변만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바다도 다른 면을 보았을 때 비로소 보이는 모습이 있었다.
대부분은 바다의 한 면만 본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으로 뻗어가는 바다 모습 말이다. 그래서 그 풍경이 바다의 정면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방파제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정면일 수도 있고 더 어쩌면 정면이란 없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더욱더 어쩌면 나도 나의 한 면 만을 보고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하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은 상대방의 다양한 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알아가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입체적으로 당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도형 같은 추상을 사랑이라 말하곤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스스로를 입체적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나는 왜 그렇게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을까.
좋고, 올바른 면만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좋은 사람이어야 하니까. 착하고, 쿨하고, 똑똑하고, 어딘가 모르게 깊이 있고, 부족함 없는 사람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못되고, 찌질하고, 무식하고, 어딘가 모르게 얕고, 가난한 밑천을 억지로, 억지로 숨겼다. 표정에서 감정이 티 날까 봐 안면 근육을 단련하듯 애써 웃기도 하고, 불만과 욕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나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기에 꾹꾹 눌러 참기도 한다. 기분이 태도가 돼선 안 되니까. 나의 어두운 면들은 머그샷으로 찍혀 절대 들켜선 안 되는 수배범으로 마음 곳곳을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좋은 표정과 올바른 자세로 찍은 증명사진만 겉모습에 잔뜩 붙인 채 살아왔다. 그 한 장의 사진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모든 면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못되고, 찌질하고, 무식하고, 어딘가 모르게 얕고, 가난한. 나의 그런 모습마저 인정할 때 비로소 스스로를 사랑할 준비가 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겹겹이 쌓인 테트라포드 사이의 어둡고, 어두운 틈사이에서 들리고, 들렸다.
으라차차.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걸었다. 결국 등대에 도착했고, 항상 점처럼 보였던 그것은 말문이 막힐 정도로 입체적이고 거대했다. 순간, 나도 등대가 되고 싶었다. 지금까진 작았을지 몰라도 다가가면 갈수록 마음이 거대한 사람. 만약 내가 정말 등대가 된다면 저 녹슬고 작은 배부터 지켜줘야지. 그렇게 조금만 더 나와 당신들을 사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