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과 테일러와의 우정이 빚어낸 철학적 급진주의의 전개
(본 글은 인문학 전문서적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밀은 스스로 인생에서 가장 <값진 우정>이라 여긴 관계를 1830년경에 맺게 됩니다. 그는 25세, 상대방은 23세로, 훗날 오랜 교류 끝에 밀의 아내가 된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였습니다. 당시 밀과 테일러 가족은 이미 구면이었지만,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친밀해진 것은 좀 더 뒤의 일입니다. 밀은 “그분은 매우 ‘깊고 강렬한 감수성(deep and strong feeling)’과 ‘직관적 지성(intuitive intelligence)’을 동시에 지닌 분이었습니다” (Autobiography, Ch. VI)라고 말하며, 그녀의 탁월한 통찰력과 고결한 인격이 자신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러나 해리엇 테일러가 처음부터 완벽한 모습으로 밀 앞에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끊임없는 <자기 성장>을 추구했고, 매 순간 경험을 통해 지혜를 쌓아간 그녀의 태도가 오히려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밀에게 해리엇은 그가 지녔던 논리적·분석적 면모와는 결이 다른,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페미닌 지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만남과 교류는 이후 밀의 철학적·정치적 확장을 촉진하는 강력한 자극제가 됩니다.
밀이 해리엇을 묘사하는 대목은 감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그녀를 “가장 ‘완벽한 도구(perfect instrument)’와도 같은 정신을 지닌 분”이라고 평가하며, 예술가로서의 감수성과 실천가로서의 통찰력을 모두 갖춘 존재였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그녀는 “위대한 연설가가 되었을 것이며(a great orator), 또 다른 시대라면 인류를 통치하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탁월했을 것입니다” (Autobiography, Ch. VI)라고 언급합니다(“would certainly have made her a great orator...have made her eminent among the rulers of mankind.”).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해리엇이 지닌 정의감과 사랑의 균형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불의에 분노하고, 동시에 인간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는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밀은 “그분의 ‘끝없는 너그러움(boundless generosity)’과 ‘모든 이를 사랑하는 마음(a lovingness ever ready to pour itself forth upon any or all human beings)’은 내 내면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Autobiography, Ch. VI)라고 고백합니다. 한편, 이런 도덕적·정서적 자질은 밀의 냉철한 이성주의와 결합되어 새로운 지적 지평을 열게 됩니다.
밀은 철학적·정치적 급진주의의 대표 사상가 중 한 명인 벤담(Jeremy Bentham)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지만, 정작 그의 사상적 성장에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 제임스 밀(James Mill)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합리주의 시대(18세기)의 마지막 계승자”라 할 만큼 단호하고 급진적 사고를 펼쳤으며, 그의 저서와 강의, 일상 대화 등은 밀에게 지적 토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공조는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밀 스스로도 “그분(아버지)의 사상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나 역시 숨겨야 할 많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Autobiography, Ch. VI)라고 밝혔듯, 아버지의 저술에 얽매여 자신이 지향하는 새로운 관점을 자유롭게 펼치기 어려웠습니다. 이 구속이 풀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제임스 밀은 결핵 증상이 악화되어 1836년 6월 23일 세상을 떠났고, 밀은 큰 슬픔 속에서도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시험해보게 되었다(I had now to try what it might be possible for me to accomplish without him)” (Autobiography, Ch. VI)며 자기 길을 찾아 나섭니다.
아버지와 함께 지적 공동체를 이루었던 밀은 1834년부터 친구였던 몰스워스(Sir William Molesworth)의 재정 지원을 받아 <런던 리뷰(London Review)>를 창간하게 됩니다. 이는 급진적인 철학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소통창구로 기획되었고, 당시 ‘철학적 급진주의(philosophic radicalism)’의 아지트가 되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잡지 운영은 쉽지 않았습니다. 제임스 밀 특유의 격정적인 논조와, 아직은 벤담주의의 영향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않은 글들이 독자층 확대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밀은 잡지의 글들이 다채로운 사상을 포용하길 원해 “글마다 이니셜을 달아, 오직 그 글쓴이의 의견만을 대변하도록 했다”고 밝힙니다(Autobiography, Ch. VI). 그렇게 해서 보다 열린 담론의 장을 만들고자 했으나, 당대 급진주의 세력이 국회 안팎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던 시기이기도 했기에, 현실적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밀은 이 무렵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미국의 민주주의』 초판을 접하고 강렬한 인상을 받습니다. “나는 토크빌의 분석을 통해 민주정체제가 가진 탁월한 장점과, 그것이 지닌 구체적 위험 요소 모두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Autobiography, Ch. VI)라고 말하며, 그가 가장 높이 평가한 것은 토크빌이 제시한 대중적 참정권의 잠재력과 다수결의 횡포 가능성을 함께 짚어냈다는 점이었습니다.
덕분에 밀은 반(反)중앙집권적 태도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대신, 지방 자치를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할 지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는 급진주의가 단순히 정부의 간섭을 줄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시민의 직접 참여가 충분히 보장되되 부작용도 최소화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이후 밀은 토크빌의 문제의식을 점차 심화하여, 대표자 정부론(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밀은 실증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의 저서 『실증철학 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 일부가 출간되자마자 탐독하였습니다. 이미 귀납적 사고 방식을 깊이 탐구하던 밀에게 콩트의 저술은 “내가 애타게 바라던 과학적 탐구의 확대판” (Autobiography, Ch. VI)이었습니다.
특히 “사회 현상의 복잡성을 분석할 때에는, 일반적 법칙에서 구체를 도출하는 전형적 연역(deduction)과 달리, 다양한 사례의 축적으로부터 일반화를 이루고, 그다음 이미 알려진 원리에照合해 검증하는 ‘역(逆) 연역 법(inverse deductive method)’이 필요하다는 통찰” (Autobiography, Ch. VI)에 밀은 크게 공감했습니다. 다만, 콩트가 말년에 구상한 강력한 ‘영적·정신적 권위(Spiritual Power)’에 의한 사회 운영 방안에는 동의하기 어려웠고, 둘 사이의 서신 교류도 결국 식어갔습니다. 밀은 “개인 자유와 자율성을 충분히 보장하지 않는 구상은 그가 그토록 강조하던 진보 정신에 어긋난다”고 보았습니다.
밀은 <런던 리뷰>에 이어, 구(舊) <웨스트민스터 리뷰(Westminster Review)>를 인수해 <런던 & 웨스트민스터 리뷰>라는 이름으로 통합 운영했습니다. 목적은 “철학적 급진주의”를 한층 성숙하게 전개하고, <특정 이념에 편향되지 않은 비판적 담론>을 구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카라일(Thomas Carlyle) 같은 인물에게 원고를 청탁해 글을 실어주면서 주목을 끌기도 했습니다.
특히 카라일의 저서 『프랑스 혁명(The French Revolution)』이 처음 출간됐을 때, 이를 호평하고 독자들에게 알린 초기 서평이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밀 스스로 “흔히 내 문장이 특별히 우수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시에 쓴 글이 독자의 인식에 전환점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It was the word in season, which...determines whether a stone...shall roll down on one side or on the other)” (Autobiography, Ch. VI)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정치 무대에서 ‘철학적 급진주의’를 내세운 의원들에게서 실질적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밀은 <의회에서의 급진파 활동>을 촉진하고자 여러 제안을 했지만, 시대적 흐름과 의원들의 한계로 인해 큰 반향을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잡지 운영은 밀 개인의 시간과 재정을 지속적으로 소모하는 일이 되었고, 그는 어느 시점에서 잡지를 떠나며 “새로운 글의 수익이 제한된 독자층에만 머무른다면,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기가 너무도 어렵다”고 한탄했습니다.
한편, 밀은 벤담(Jeremy Bentham)의 공헌을 존중하면서도, “벼려진 도구이되 그 너머에 있는 다양한 인간의 감정이나 미덕을 놓치고 있었다는 점” (Autobiography, Ch. VI)을 지적합니다. 그는 벤담주의를 보편적 진리처럼 여기는 태도를 경계하면서도, 특정 제도나 윤리체계에서 벗어나 더 넓은 반성을 끌어낸 벤담의 성과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반면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를 다룬 글에서는, 18세기의 ‘부정철학’(negative philosophy)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예민하게 포착합니다. 밀은 “콜리지가 강조한 상상력과 정서, 그리고 공동체적 통찰이 18세기 합리주의의 빈틈을 채워줄 수 있다”고 보았지만, 그것 또한 미래의 자유와 개별성을 훼손하지 않는지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벤담과 콜리지를 균형 잡아 비교·평가함으로써, 밀 스스로 자신의 정치·사회철학을 더욱 깊고 폭넓게 진전시켰습니다.
결국 밀에게 이 모든 과정은 <자유>, <개인의 성장>, <사회적 진보>라는 세 가지 지점을 교차시켜 바라보게 만든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해리엇 테일러와의 만남, 아버지의 죽음, <런던 & 웨스트민스터 리뷰>를 통한 지적 실험, 토크빌과 콩트의 저작들, 그리고 벤담·콜리지에 대한 비판적 수용 등은 모두 그가 “온전히 자신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실천할 수 있는” 철학자가 되는 기반을 다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 글은 [Autobiography, J. S. Mill (1873, Ch.6.)]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