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을 향한 여정을 함께 고민해보는 안내서 (3)
(본 글은 인문학 전문서적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니체는 이 장(XXII장)에서 ‘증여하는 덕’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내세우며, 전통적인 도덕적 선행과 구분되는 ‘베풂’을 강조합니다. 곧, 세상의 가치를 초월하면서도 아낌없이 나누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해보라, 금은 어떻게 최고 가치를 얻게 되었는가? 그것은 드물고 이윤이 되지 않으며 빛나고 부드럽게 빛나기 때문이며, 늘 스스로를 베푼다.” (Tell me, pray: how came gold to the highest value? Because it is uncommon, and unprofiting, and beaming, and soft in lustre; it always bestoweth itself.) - XXII장
여기서 금은 희소성과 광채 때문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기꺼이 베푸는” 상징적 태도를 통해 최고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메시지가 드러납니다. 니체에 따르면 덕(德) 역시 칭송이나 보상을 기대하기보다, “아낌없이 주어질 때” 가장 높은 가치를 발휘합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인간이 자신을 넘어서는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 핵심에는 ‘땅에 충실하라’는 주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존 도덕이나 관념적 위로에 매이지 않고, 이 세상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땅에 충실하라, 형제들이여, 너희 덕의 힘으로!” (Remain true to the earth, my brethren, with the power of your virtue!) - XXII장
이처럼 니체에게 초인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탈세속적 존재가 아니라, 기존의 기준을 넘어 자기 삶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인간입니다. 초인은 더 이상 신(God) 혹은 추상적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땅과 삶의 감각적 실재 속에서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나갑니다.
차라투스트라는 한동안 산 속 동굴에 머물며 고독한 시간을 보냅니다. 어느 날 꿈에서 한 아이가 거울을 들고 나타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라”고 요청하는데, 정작 그 거울에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비뚤어진 악마의 형상이 비칩니다.
“오 차라투스트라—하고 아이가 내게 말했지—거울 속에 비친 너 자신을 보라!” (O Zarathustra—said the child unto me—look at thyself in the mirror!) - XXIII장
“진실로, 나는 그 꿈의 징조와 경고를 너무도 잘 이해한다. 나의 교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 잡초가 밀이라고 불리길 원한다!” (Verily, all too well do I understand the dream’s portent and monition: my DOCTRINE is in danger; tares want to be called wheat!) - XXIII장
이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 세상 속에서 왜곡·오염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곧, 진정한 교의와 취지가 잡초처럼 위장된 형태로 번져나가는 현실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진정한 가르침’을 찾아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역설합니다.
니체는 오랫동안 기독교 윤리의 근간으로 여겨져 온 ‘연민(pity)’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진정한 연민이라 주장되더라도, 때로는 ‘베푸는 자의 우월감’이나 ‘수치심을 유발하는 동정’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사랑하는 이들 가운데 자신을 높이는 전망이 없는 자들에게 화로다!” (Woe unto all loving ones who have not an elevation which is above their pity!) - XXV장
그는 연민의 행위가 자칫 상대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거나, 스스로에게도 위선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큰 의무를 받은 이는 감사하기보다 앙심을 품게 된다”는 언급처럼, 선의의 도움이 오히려 감정적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니체는 겉으로는 ‘착한 마음’처럼 보이는 연민도 철저한 자기 성찰을 동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일종의 제도화된 종교 관념을 ‘속박’의 은유로 제시합니다. ‘구원자(Saviour)’라 불리는 존재가 실은 사람들을 족쇄에 가두고 있다는 역설이죠.
“그들이 구원자라 부르는 이는 그들을 족쇄에 가두어 놓았다… 누군가 그들을 그 구원자로부터 구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He whom they call Saviour put them in fetters:— Oh, that some one would save them from their Saviour!) - XXVI장
이는 맹목적 신앙이나 기존 종교적 권위에 기대서는 참된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비판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자유정신’(free spirit)은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고하고 삶의 가치를 새롭게 구성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절대적 구원자를 외부에서 찾는 대신,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씨름하며 내면의 잠재력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의 길이라는 것이지요.
니체는 선악의 기준이 단지 ‘상(賞)’과 ‘벌(罰)’에 매달리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인간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때, 기존의 보상-처벌 체계를 넘어 진정으로 자기 존재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덕이 너의 자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그러하듯, 너의 덕이 바로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Ah! my friends! That YOUR very Self be in your action, as the mother is in the child: let that be YOUR formula of virtue!) - XXVII장
이처럼 덕이란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인정이 아닌, 자기 존재를 관통하는 근본적 태도입니다. 남들의 칭찬이나 반응을 기대하는 식의 ‘외적’ 덕이 아니라, 삶 자체를 통해 ‘내적’으로 실현되는 창조적 덕을 니체는 강조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내놓고, 홀로 산 속에서 고독을 음미하며 성찰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가 ‘하산’의 길을 선택하지요. 이 과정에서 니체가 말하는 ‘춤(dance)’의 이미지는 삶을 가볍고 자유롭게 펼쳐내는 태도를 은유합니다.
“진실로, 폭풍처럼 내게 찾아오는 것이 나의 행복이며, 또한 나의 자유이다!” (Verily, like a storm cometh my happiness, and my freedom!) - XXIII장
이러한 춤과 폭풍의 이미지는 모든 권위와 무거움(‘중력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정신의 해방을 상징합니다. 춤추듯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이나 사회가 부여한 가치를 맹종하는 대신, 자신의 고유한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것입니다.
니체가 묘사하는 ‘밤의 노래(Night-Song)’(XXXI장)와 ‘춤의 노래(Dance-Song)’(XXXII장)은, 인간 내면의 깊은 열망과 환희가 교차하는 시적 장면입니다.
“밤이로다: 이제 모든 샘들은 더 큰 소리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 영혼 역시 더 큰 소리로 흐르는 샘이다.” (’Tis night: now do all gushing fountains speak louder. And my soul also is a gushing fountain.) - XXXI장
“나는 내 스스로의 빛 속에서 산다. 그리고 내게서 터져 나오는 불꽃들을 다시 마신다.” (I live in mine own light, I drink again into myself the flames that break forth from me.) - XXXI장
밤의 고요 속에서도 내면 깊은 곳에서 샘솟는 생명력과 창조적 에너지를 ‘샘(fountain)’과 ‘빛(light)’의 은유로 보여줍니다. 삶 자체를 여성적인 존재로 비유하며 때로는 그 삶이 우리를嘲笑(조소)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을 안겨주기도 한다고 말하지요. 결국 니체가 바라보는 세계란, 끊임없이 “새로운 아침”을 향해 스스로를 극복해가는 역동적인 무대입니다. 여기서 ‘초인’이라는 이름은 그 과정을 멈추지 않는 인간의 자기 초월적 지향을 상징합니다.
(본 글은 [THUS SPAKE ZARATHUSTRA, Nietzsche (1883)]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