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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노래인가 아니면 예언인가-니체의 단말마

무덤 곁에서 시작되는 의지와 자기 초월의 이야기 (4)

(본 글은 인문학 전문서적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I. 무덤의 노래 (The Grave-Song)

- 죽음의 섬에서 젊은 날의 환영들을 회고하다


니체가 말하는 <무덤의 섬>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스스로 잃어버린 과거와의 대면을 상징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젊은 시절 사랑했던 사람과 가치들이 “죽은 이들”로서 남았음을 회고하며, 그 상실감을 노래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과거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아직도 자신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희망도 암시합니다.

“오, 내가 청춘 시절 마주했던 광경들이여! … 오늘 나는 너희를 내 죽은 것들이라 부릅니다.” (Oh, ye sights and scenes of my youth! … I think of you to-day as my dead ones. - XXXIII. THE GRAVE-SONG)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라는 무덤에서 달아나지 않고, 오히려 그 무덤에서 새로운 의지의 화환을 바치려 합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금 되살려내는 과정이,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원동력이 됩니다.


II. 자기 초월 (Self-Surpassing)

- 의지와 삶의 본질을 향해 스스로를 넘어서는 법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 동력을 의지로 파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생존만을 지향하는 삶을 향한 의지가 아니라, 스스로를 창조적으로 확장하려는 권력을 향한 의지라고 선언합니다. 모든 생명은 이 ‘권력 의지’를 통해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생명이 있는 곳에만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지는 삶을 향한 의지가 아니라—내가 그대에게 가르치는 바, 권력을 향한 의지입니다!” (Only where there is life, is there also will: not, however, Will to Life, but—so teach I thee—Will to Power! - XXXIV. SELF-SURPASSING)

이는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적극적 개조를 의미합니다. 과거의 자신을 부정·초월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가는 ‘자기 극복’이야말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역설하는 핵심 원리입니다.


III. 숭고한 이들 (The Sublime Ones)

- 절제되지 않은 숭고함을 넘어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차라투스트라는 숭고한 자세를 취하는 이들의 엄숙함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가 진정한 생의 환희와 웃음을 앗아갈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는 늘 호랑이처럼 뛰어오를 태세로 서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팽팽한 영혼들이 싫습니다. 나의 취향은 이기적 몰두에 빠진 이들을 달갑게 여기지 못합니다.” (As a tiger doth he ever stand, on the point of springing; … ungracious is my taste towards all those self-engrossed ones. - XXXV. THE SUBLIME ONES)

<숭고함>은 인간을 고양시키지만, 동시에 지나친 긴장 상태에 빠지면 오히려 자기 완결적 세계에 갇힐 수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여기에 아름다움유연함이 함께할 때 진정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다고 말씀하십니다.


IV. 문화의 땅 (The Land of Culture)과 순수 인식 (Immaculate Perception)

- 다채로운 가면과 허위 인식을 벗어나는 길


(i) 문화의 땅 (The Land of Culture)

차라투스트라는 오랜 은둔 끝에 “문화의 땅”으로 돌아와, 눈부시게 다채롭지만 어딘가 공허한 군상들을 바라봅니다. 전통과 습관, 지식과 허영이 겹겹이 쌓인 탓에 정작 본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에 실망을 감추지 않습니다.

“내가 본 너희는 가면보다 더 나은 가면을 쓸 수 없었으니, 도대체 누가 너희의 참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겠는가!” (Verily, ye could wear no better masks, ye present-day men … who could—RECOGNISE you! - XXXVI. THE LAND OF CULTURE)

(ii) 순수 인식 (Immaculate Perception)

이어지는 <순수 인식> 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을 관조하는 태도만으로는 진정한 창조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욕망을 배제하고 “깨끗한” 시선으로만 바라본다면, 오히려 생의 열정과 결합하기 어렵다는 지적입니다.

“너희의 욕망에는 순수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욕망 자체를 비난하지만, 나는 월광처럼 비추기만 하는 그런 시선을 원치 않습니다!” (Ye lack innocence in your desire: and now do ye defame desiring on that account! - XXXVII. IMMACULATE PERCEPTION)

그는 철저히 참여하고 책임지는 태도, 즉 창조적이고 열정적인 시선만이 진실에 닿을 수 있다고 역설하십니다.


V. 학자들 (Scholars)과 시인들 (Poets)

- 지식 탐구와 예술적 표현이 빠지기 쉬운 함정


(i) 학자들 (Scholars)

학자들의 정밀한 작업에도 불구하고,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이 삶과 유리된 ‘과하게 분절된 지식’에 빠질 위험을 경고하십니다.

“그들이 스스로 현자라 칭할 때면, 나는 그들의 사소한 격언과 진리가 차갑게 느껴집니다. 한때는 그 안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When they give themselves out as wise, then do their petty sayings and truths chill me … I have even heard the frog croak in it! - XXXVIII. SCHOLARS)

(ii) 시인들 (Poets)

시인들 역시 수면 위를 맴도는 얕은 메아리에 그칠 위험이 있습니다. 깊은 심연에 대한 통찰 없이 표면적인 미학에 머무를 때, 그들의 노래는 금세 공허해지고 만다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지적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깊은 곳까지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감정도 밑바닥까지 닿지 못했습니다.” (They did not think sufficiently into the depth; therefore their feeling did not reach to the bottom. - XXXIX. POETS)

결국 학문이든 예술이든 표면적·형식적 고양에만 머무르면, 삶의 본질에 다가가는 길이 멀어진다고 경고하십니다.


VI. 위대한 사건 (Great Events)과 예언자 (The Soothsayer)

- 소란한 사건과 묵시록적 허무주의의 함정


(i) 위대한 사건 (Great Events)

<위대한 사건>이라 불리는 것들이 실제로는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 있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요란한 폭발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고요한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새로운 소음의 발명가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자를 중심으로 돈다. 그것은 소리 없이 돈다.” (Not around the inventors of new noise, but around the inventors of new values … inaudibly it revolveth. - XL. GREAT EVENTS)

(ii) 예언자 (The Soothsayer)

예언자가 전하는 ‘모든 것이 텅 비었다’는 허무주의적 메시지는 차라투스트라에게 큰 슬픔을 안깁니다. 그러나 허무를 외면하지 않고 통과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은 미래를 준비할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이 공허하고, 모든 것이 같고, 모든 것이 이미 있었습니다!” (All is empty, all is alike, all hath been! - XLI. THE SOOTHSAYER)

허무의 심연을 지나야만 도달할 수 있는 더 높은 비전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VII. 구원 (Redemption)과 남성적 신중 (Manly Prudence)

- 과거를 재구성하는 의지와 인간적 분별


(i) 구원 (Redemption)

과거를 되돌릴 수 없는 한, 의지는 스스로를 옭아매며 괴로워합니다. 니체는 이를 복수심이라 부르며,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되는 고통을 경고하십니다. 진정한 구원은 이 과거의 멍에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할 때, 다시 말해 “그랬었다(It was)”“나는 그렇게 의지한다(Thus do I will it)”로 바꾸는 데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지나간 것을 구원하고, “그랬었다”를 “나는 그렇게 의지한다”로 바꾸는 것, 오직 그것이 내가 말하는 구원입니다.” (To redeem what is past … that only do I call redemption! - XLII. REDEMPTION)

(ii) 남성적 신중 (Manly Prudence)

차라투스트라는 삶이란 절대적으로 안전하거나 단순하지 않으며, 모험과 결단 그리고 때로는 ‘속아 줌’마저 감수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나치게 숭고하거나 높은 곳만 좇으면 인간 세상에서 멀어질 수 있기에, 한편으로는 소탈하고 유연한 태도도 필요하다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남성적 신중입니다. 나는 스스로 속아 넘겨집니다. 속이는 자들에 대해 경계하는 마음을 품지 않기 위함입니다.” (This is my first manly prudence, that I allow myself to be deceived … so as not to be on my guard against deceivers. - XLIII. MANLY PRUDENCE)


VIII. 가장 고요한 시간 (The Stillest Hour)

- 침묵과 고독 속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부름

마지막으로, 가장 고요한 시간 장면은 차라투스트라가 깊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더 높은 결심으로 나아가는 결정적 순간입니다. 그 목소리는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위하여 다시 한번 은둔하라고 명령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두려움 속에서도 그 침묵의 소리를 거역할 수 없음을 고백하십니다.

“그대의 열매는 이미 익었으나, 그대는 아직 그 열매에 걸맞지 않으니—다시 홀로 가라!” (Thy fruits are ripe, but thou art not ripe for thy fruits! … so must thou go again into solitude. - XLIV. THE STILLEST HOUR)

결국 그는 또다시 세상을 떠나,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돌아올 것을 암시하십니다. 이 결단은 ‘자신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한 응답이자, 동시에 자신의 가르침을 완성하기 위한 고독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본 글은 [THUS SPAKE ZARATHUSTRA, Nietzsche (1883)]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으며,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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