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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다는 자들에 의해 악이라 불려온 것들, 모두 모여라

혼돈 속에서 탄생하는 인간의 더 높은 가능성을 향해- 니체 (5)

(본 글은 인문학 전문서적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I. 오래된 표와 새로운 표(Old and New Tables)

- 도덕적 기준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세우라는 외침입니다.


니체가 새로운 표(new tables)를 말할 때, 그는 단순히 기존 제도나 도덕적 교리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4부 중 “LVI. OLD AND NEW TABLES”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기존의 오래된 표(Old Tables)가 교조적으로 굳어짐으로써 인간 본연의 창조적 가능성을 질식시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아직까지 아무도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NO ONE YET KNOWETH what is good and bad.’ - LVI.2)”라고 선언하며, 그 누구도 미리 정해진 기준으로부터 선악을 확정할 수 없음을 역설합니다.

오래된 표를 전복하고 새로운 표를 세우는 행위는 곧 인간이 자신의 목표와 의미를 부여하는 자유로운 창조자의 길을 걷는다는 뜻입니다.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표를 세우는 과정 자체가 위험하고 고통스럽지만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인간의 과업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의 과거를 구원하고, 모든 ‘그랬다(It was)’를 변형하라. 의지가 말하길 ‘내가 그렇게 원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원하리라(‘The past of man to redeem, and every It was to transform, until the Will saith: “But so did I will it! So shall I will it—”’ - LVI.3)”라고 말하며, 과거까지도 새롭게 창조하고 재평가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II. 선악의 경계를 넘어가는 웃음

- 도덕의 경직성을 비웃고, 삶을 춤추듯 긍정하라는 권고입니다.


니체 사유에서 웃음은 기존의 권위와 관념을 전복하는 중요한 모티프입니다. “LVI. OLD AND NEW TABLES” 7절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른바 선하다고 불리는 것이 때로 진실로부터 멀어질 수 있음을 지적하며, “"오, 저 선한 이들이여! 선한 자들은 결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Oh, those good ones! GOOD MEN NEVER SPEAK THE TRUTH.’ - LVI.7)”라고까지 선언합니다. 기성의 이 시대에 따라 변질되고, 그로 인해 인간을 속박할 가능성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이 경직된 선악의 기준을 파괴하는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웃음입니다. 웃음은 기존 표(기성 도덕, 교리)에 대한 도전이자, 더 가볍고 자유로운 존재로 나아가는 힘입니다. 이는 “선하다는 자들에 의해 악이라 불리는 것들이 모두 모여야 비로소 하나의 진리가 태어난다(‘All that is called evil by the good, must come together in order that one truth may be born.’ - LVI.7)”라는 구절에서도 드러납니다. 결국 웃음은 ‘가볍게 넘어서기’를 통해 새로운 길을 찾는 능동적 자세를 상징합니다.


III. 인간, 다리를 건너야 할 존재

-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초인’을 향해 가야 할 중간자라는 통찰입니다.


“인간은 넘어야 할 무엇이며, 극복되어야 할 존재다”라는 니체의 구절은 대표적입니다. “LVI. OLD AND NEW TABLES” 3절에서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man is something that must be surpassed.’ - LVI.3)”라고 선언하며, 인간이 어떤 완성된 본질이 아니라 잠재적 초인(Übermensch)으로 가기 위한 다리라는 비전을 제시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매 순간 스스로를 극복하고 미래를 창조하는 주체로 그립니다. 예컨대 “"인간은 다리요, 목표가 아니다 —정오와 저녁을 기뻐하며, 새로운 장밋빛 새벽으로 나아간다(‘That man is a bridge and not a goal—rejoicing over his noontides and evenings, as advances to new rosy dawns.’ - LVI.3)”라는 말은, 인간이 이 다리 위에서 불안정하지만, 새벽을 향해 계속 걷는 존재라고 강조합니다.


IV. 영원회귀와 대낮의 선언


- 모든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삶을 어떻게 긍정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영원회귀 사상은 니체 철학을 관통하는 중요한 관념입니다. “LVII. THE CONVALESCENT”에서 “"모든 것은 영원히 가고, 영원히 되돌아온다. 영존의 수레바퀴가 영원히 돈다(‘Everything goeth, everything returneth; eternally rolleth the wheel of existence.’ - LVII.2)”라고 언급되는데, 이는 삶의 모든 순간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극단적 사고 실험입니다.

니체는 이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도 강한 긍정을 외칩니다. 즉, “영원히 반복될 이 삶을 무한히 다시 살고 싶다”고 선언할 정도로 삶을 긍정해야 진정한 초인에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차라투스트라는 “"나는 차라투스트라, 생을 옹호하고 고통을 옹호하며, 순환을 옹호하는 자다(‘I, Zarathustra, the advocate of living, the advocate of suffering, the advocate of the circuit...’ - LVII.1)”라고 말하며, 고통과 부조리마저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전에는 “the advocate of the circuit” 부분이 누락되어 있었는데, 이는 원문 전체 표현을 반영한 것입니다.)

니체가 대낮(the great noontide)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이 극도의 긍정이 환하게 드러나는 ‘결정적 순간’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LVI.3”에서도 “"미래를 창조하고, 모든 ‘그래왔다’를 창조로써 구원하는 것(‘to create the future, and all that HATH BEEN—to redeem by creating.’ - LVI.3)”이야말로 바로 이 정오의 태양 아래 스스로 운명을 새로 쓰는 창조적 결단임을 강조합니다.


V. 고독, 타인, 그리고 ‘고등 인간(Higher Man)’

- 더 높은 목표를 향해 가는 이에게는 고독과 ‘다른 목소리’가 동시에 찾아옵니다.


“LXII. THE CRY OF DISTRESS”와 “LXIII. TALK WITH THE KINGS”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고등 인간이라 불리는 존재의 절박한 외침을 듣고 당황합니다. “"누가 저 위에서 나를 부르는가?(‘And who is it that there calleth me?’ - LXII)”라고 묻지요. 니체의 맥락에서 이 ‘고등 인간’은 초인 사상으로 나아갈 잠재적 대상이기도 하고, 그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실제로 차라투스트라가 왕(Kings)들이나 군중을 대할 때, 그들은 기존의 가치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을 무작정 배척하기보다, 함께 더 높은 가치를 향해 걸어갈 여지를 엿봅니다. “"여기서는 네가 집에 있지 않고, 내 영역이니, 그 누구도 상처받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Here thou art not at home, but in my domain, and therein shall no one receive any hurt.’ - LXIII.1)”라는 말은, 그의 영역 안에서만큼은 모두가 새로운 가치를 모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고독과 소란스런 외침이 늘 뒤따른다는 점도 분명하지요.


VI. 꿀의 제사(The Honey Sacrifice)와 고통의 목소리

- 자신이 얻은 충만한 기쁨을 미끼로 내던져,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인류의 ‘물고기들’을 부르려는 은유입니다.


“LXI. THE HONEY SACRIFICE”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나는 최고의 미끼로 오늘 가장 이상한 인간 물고기들을 낚으리라!(‘With my best bait shall I allure to myself to-day the strangest human fish!’ - LXI)”고 외칩니다. 여기서 은 충만한 행복과 자기 긍정을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타인을 깨우기 위한 미끼로 쓰입니다.

특이한 점은 이 ‘희생(제사)’이 자기비하나 금욕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최고의 것’을 기꺼이 세상에 던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것을 탕진하는 자, 천 개의 손을 가진 탕진꾼(‘I squander what is given me, a squanderer with a thousand hands.’ - LXI)”이라는 말처럼, 넘치는 에너지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것이 진정한 ‘꿀의 제사’가 됩니다.

한편, “LXII. THE CRY OF DISTRESS”에 등장하는 “"고통의 외침(‘the cry of distress.’ - LXII)”은 이 희생의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 내면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외침’을 모른 척하지 않고, 고통받는 이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는 초인이 개인적 고독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외침에 응답하여 그들을 자신의 길로 이끌고자 하는 사명을 보여줍니다.


VII. 양심적 자(The Conscientious One)와 거머리(The Leech)

- 탐구에 헌신하지만, 끝없는 의심에 갇힌 자를 통해 ‘한계를 넘어서는 통합’을 모색합니다.


“LXIV. THE LEECH”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숲에서 양심적 자(Spiritual Conscientious One)를 우연히 발로 밟아버립니다. 그는 “"그러나 내가 주인이고 아는 것은 거머리의 두뇌뿐이니, 그것이 바로 내 세계!(‘that, however, of which I am master and knower, is the BRAIN of the leech:—that is MY world!’ - LXIV)”라고 말할 정도로 특정 분야에만 집착하고, 그 과정에서 몸까지 상하게 할 정도로 자신을 소모하는 학자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딱하게 여기면서도, 이처럼 편협하지만 엄밀한 진리 추구가 인간을 어떻게 전체적 통찰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발견합니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 분야에 몰두하는 학문적 태도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로 인해 더 큰 세계를 놓치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차라투스트라는 “"내 동굴로 함께 가서 그 상처를 돌보겠다(‘Up thither is the way to my cave: to-night shalt thou there be my welcome guest!’ - LXIV)”며 그를 초대합니다. 이는 극도로 분화·전문화된 시선 속에서도, 인간이 더 높은 차원의 인식과 삶의 가능성으로 열릴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본 글은 [THUS SPAKE ZARATHUSTRA, Nietzsche (1883)]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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