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비상을 동시에 품은 철학적 모험을 향해- 니체 (6)
(본 글은 인문학 전문서적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니체가 창조해낸 차라투스트라는 평생을 방랑하며 산과 바다를 넘나드는 인물입니다. 이 여정 속에서 그는 자기 내면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운명을 향해 도전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나는 방랑자이자 산을 오르는 사람이다 (I am a wanderer and mountain-climber).” - 『Thus Spake Zarathustra』, Third Part, XLV. THE WANDERER>라는 말처럼, 차라투스트라는 평지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더 높은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 고독한 순례는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라 스스로를 넘어서기 위한 정신적 고행이기도 합니다.
그가 “행복한 섬(Happy Isles)”을 떠나 다시 산 정상으로 가는 과정은, 외부 세계에서 매번 새로운 통찰을 얻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에 대해 [“나는 이제 나의 가장 외로운 순례를 시작했다” (“Now hath my last lonesomeness begun.” - Third Part, XLV. THE WANDERER)]라고 선언하며, 고독을 기꺼이 택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 고독은 방황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발견의 단서가 되어, 그를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갑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걷고 또 걸어 마주치는 모든 봉우리를 ‘자기 극복’의 상징으로 삼습니다. [“산 꼭대기와 심연—이제 이 둘이 함께 있다” (“Summit and abyss—these are now comprised together!” - Third Part, XLV. THE WANDERER)]라는 문장에서 보이듯, 정상을 앞두고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깊은 심연까지 함께 포괄해야 한다는 뜻이 드러납니다. 이는 내면에 도사린 두려움과 한계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는 니체 사상의 핵심입니다.
특히 [“네가 오를 사다리가 모두 사라졌다면 이제 네 머리 위로 올라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And if all ladders henceforth fail thee, then must thou learn to mount upon thine own head.)” - Third Part, XLV. THE WANDERER]라는 대목에서는, 외적인 도움 없이 자신의 내부에서 새로운 힘을 길어 올리는 결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머리 위로 올라섬’은, 자기 존재를 뛰어넘을 마지막 용기이자 최고의 수련 과제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서도 처음 이틀간 침묵만 지키다,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모험자들(daring venturers)”에게 자신의 ‘비전과 수수께끼’를 꺼내놓습니다. 그는 가장 외로운 자의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며, [“나는 최근에 가장 어두운 황혼 속에서 걸었고, 그것은 하나의 예감이었다 (I SAW—the vision of the lonesomest one.)” - Third Part, XLVI. THE VISION AND THE ENIGMA]고 고백하고, 미래를 암시하는 상징적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그중 가장 강렬한 비유가 ‘목동과 검은 뱀’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목동이 목구멍 안쪽에 박힌 뱀을 물어뜯어 뱉어내는 광경을 보면서, [“더 이상 목동이 아닌, 빛에 싸인 존재가 되어 웃고 있었다 (No longer shepherd, no longer man—a transfigured being...that LAUGHED!)” - Third Part, XLVI. THE VISION AND THE ENIGMA]는 충격적이고 해방적인 순간을 목격합니다. 이는 인간을 옭아매던 극심한 공포나 죄책감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에 대한 상징이며, 니체가 말하는 ‘가장 외로운 자’의 필연적 통과의례이기도 합니다.
태양이 아직 떠오르지 않은 새벽의 시간은 니체가 그리는 가장 맑고도 깊은 고요의 순간입니다. <“오 하늘이여, 너는 얼마나 맑고도 깊은가 (O heaven above me, thou pure, thou deep heaven!)” - Third Part, XLVIII. BEFORE SUNRISE>라는 탄성에서 나타나듯, 이 시간대에는 말 대신 침묵과 미소가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집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새벽 전’ 고요 속에서 하늘과 자신이 하나임을 체감하며, 일상적 목적의식을 넘어서는 자유를 발견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어떠한 의도도 없이 모든 것을 긍정하고 축복할 수 있다”는 취지는, 억지로 무엇을 바꾸려 하기보다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자세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도와 목표를 내려놓을 때, 인간은 오히려 가장 높은 차원의 춤을 출 수 있게 된다고 니체는 역설합니다.
니체는 인간을 옭아매는 보이지 않는 권위와 부담을 ‘중력(spirit of gravity)’이라 부릅니다. 이 중력은 삶을 무겁게 만들고, 인간이 날아오르는 것을 억누르는 온갖 가치 체계를 상징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여행 도중 난쟁이(dwarf)라는 환영적 존재를 만나는데, 난쟁이는 [“네가 스스로를 높이 던졌다 해도 결국 돌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 “O Zarathustra... every thrown stone—must fall!” - Third Part, XLVI. THE VISION AND THE ENIGMA)]라며 차라투스트라의 비상을 비웃습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은 가장 용감한 동물이다. 그 용기가 심연 앞에서의 현기증마저 죽인다”라고 선언합니다. 원문에서 [“Man, however, is the most courageous animal... Courage slayeth also giddiness at abysses” (Third Part, XLVI. THE VISION AND THE ENIGMA)]라 하듯, 이 용기야말로 심연을 응시하면서도 끝내 주저앉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중력에 짓눌리지 않고 더욱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려면, 발아래에 새겨진 ‘불가능’이라는 표지를 과감히 지워야 하고, 그 과정 자체가 곧 “스스로의 머리 위로 올라서는” 극복의 길이 됩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 니체는 인간을 ‘작게 만드는 덕 (the bedwarfing virtue)’을 경계합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안함과 안전을 선(善)이라 여기고 위험을 피하려 하며, 이를 [“중간 정도의 미덕 (mediocrity)” (“We set our chair in the MIDST...That, however, is MEDIOCRITY.” - Third Part, XLIX. THE BEDWARFING VIRTUE)]이라 칭합니다.
이들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을 만큼만 선을 그어 살아가고, 웬만한 욕망은 자제하면서 ‘적당히 좋은 삶’에 안주합니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그러한 태도는 인간이 가진 더 큰 가능성을 애초에 봉쇄하고, ‘안전지대’ 안에서만 머무르게 만듭니다. 삶을 지루할 정도로 안전하게 만들려는 이들은, 자신을 뛰어넘는 강력한 비상이나 고양된 욕망을 결코 체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니체의 경고입니다.
‘성적 쾌락(Voluptuousness)’, ‘권력에 대한 열정(Passion for power)’, ‘이기심(Selfishness)’은 전통적으로 악(惡)으로 분류되어 왔으나, 니체는 이 세 가지가야말로 인간적 열정의 핵심이며, 때로는 자기 극복의 추진력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쾌락(Voluptuousness)... 자유로운 영혼에게는 무구하고도 자유로운 것... 더 높은 행복의 상징적 기쁨 (the great symbolic happiness of a higher happiness)” - Third Part, LIV. THE THREE EVIL THINGS]이라는 식의 표현에서 보이듯, 낮은 차원에서는 독이 될 수도 있으나 더 높은 차원에서는 삶을 고양시키는 포도주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권력욕’ 또한 비난받기만 했으나, 니체에게는 보다 높은 목표로 돌진하게 만드는 동력입니다. “사다리가 모두 사라졌을 때 머리 위로 올라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발상처럼, 자기 내부의 힘을 최대로 끌어내고 세상을 넘어서려면 강렬한 욕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기심’ 역시, [“건강하고 자유로운 자아애 (‘one must learn to love oneself—...with a wholesome and healthy love.’ - Third Part, LV. THE SPIRIT OF GRAVITY)”]를 통한 자기 정립의 발판으로 재해석됩니다. 이는 왜곡된 ‘자기중심성’과 구분되며, 자기 자신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결국 차라투스트라는 여행을 마치고 다시 ‘산과 동굴’이라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 귀향은 단순한 휴식이나 퇴행이 아니라, [“이제 나의 마지막 고독이 시작되었다” (“Now hath my last lonesomeness begun.” - Third Part, XLV. THE WANDERER)]라는 역설적 결론을 보여줍니다. 세상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말하고자 애쓰던 기간 동안, 그는 오히려 더 깊은 형태의 고독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돌아와 확인하게 되는 것은, ‘고독은 도피가 아니라 자유를 위한 전제’라는 사실입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 가장 어두운 밤하늘이 없었다면 찬란한 새벽도 없었을 것이라는 깨달음처럼, 고독은 인간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분화구를 열어줍니다. 니체에게 있어 귀향은 곧 ‘다시 떠나기 위한 발판’이며, 그가 다시금 세상 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때 한층 더 높은 수준의 자유를 획득하게 됩니다.
(본 글은 [THUS SPAKE ZARATHUSTRA, Nietzsche (1883)]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