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전사부터 창조적 고독까지, 삶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길 (2)
(본 글은 인문학 전문서적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0장, “War and Warriors”)에서 펼쳐 보이는 전쟁과 전사의 이미지는 단순히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더 높은 가치를 위해 부딪히는 존재론적 투쟁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전쟁>은 삶을 향한 진취적 태도이며, <전사>는 나태한 평온을 깨뜨리고자 결심한 인간의 메타포입니다.
니체는 사람들이 “너희는 평화를 수단으로만 사랑하라” (You shall love peace as a means to new wars…) (10장)라고 말하며, 끝없는 투쟁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단련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적>이라는 개념을 외부의 누군가만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도 존재한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너희가 참다운 전사라면, 마음 깊은 곳의 질투와 증오를 숨기지 말라” (10장)라는 문장은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미움과 질투 같은 감정을 느끼지만, 이를 숨기거나 부정하기보다 똑바로 마주함으로써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니체는 “너희의 적을 찾아라. 그리고 너희의 전쟁을 일으켜라. 생각을 위해 싸워라” (Your enemy shall ye seek; your war shall ye wage, and for the sake of your thoughts!) (10장)라고 선언합니다. 이 ‘생각을 위한 전쟁’은 개인의 가치와 신념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자, 자기 극복을 향한 열망입니다. 니체에게 전사가 되는 길은 내면의 나태·편안함과 싸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가장 차가운 괴물이라 불리는 것은 국가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말한다. ‘내가 곧 백성이다’라고.” (11장, “The New Idol”)라고 니체는 경고합니다. 그는 국가라는 조직이 사람들을 일률적으로 포섭하고, 각자의 고유한 목소리와 가치를 앗아간다고 보았습니다.
니체에게 국가는 “파멸자로서 수많은 사람을 덫에 빠뜨린다” (Destroyers, are they who lay snares for many, and call it the state…) (11장)이며, 그 결과 개인이 자기 삶을 스스로 창조할 자유가 훼손됩니다. 그래서 니체는 국가를 ‘새로운 우상’이라고 부르며,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태도를 철저히 의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경고는 “이 새로운 우상은 선과 악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느리고 긴 죽음’을 삶이라고 부른다” (the state, where the slow suicide of all – is called ‘life.’) (11장)라는 니체의 언급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국가가 제시하는 획일적 표준, 혹은 그 권위에 순종하다 보면, 우리는 점차 ‘생생한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벗이여, 소란스러운 시장터를 떠나 고독 속으로 도망쳐라” (Flee, my friend, into thy solitude!) (12장, “The Flies in the Market-Place”)라는 직설적인 권유를 합니다. 그는 대중적인 명성이나 군중의 칭송이 실체 없는 허상이며, 인간을 왜곡된 방향으로 몰고 간다고 비판합니다.
“시장터”는 사람들의 잡음과 소문이 끊이지 않는 공간입니다. 니체는 그곳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는 활력”에 주목하며, “작은 이들” (the little ones)은 무수히 많고, 그들은 독침처럼 너를 찌를 것입니다 (12장). 즉, 자잘한 비난과 찬사에 얽매이다 보면 결국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군중을 피하고 solitude(고독) 속으로 들어가 자기만의 사유와 창조를 이루라고 조언합니다. “고독은 때때로 외롭지만, 참된 창조는 군중 속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그의 신념은, 삶의 ‘본질적 내면’을 되찾는 길이 고독 속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니체는 “내가 너희에게 정결을 권하느냐? 정결은 어떤 자에게는 미덕이지만, 많은 자에게는 악덕에 가깝다” (Do I counsel you to chastity? Chastity is a virtue with some, but with many almost a vice.) (13장, “Chastity”)라고 말합니다. 이는 맹목적인 금욕이 아니라, 본능과 충동을 어떻게 ‘보다 건강하게’ 다루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는 “본능을 죽이라고 충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능을 순진함으로 돌아가게 하라” (I counsel you to innocence in your instincts.) (13장)고 촉구합니다. 인간의 욕망이나 성적 충동은 선악 이전의 문제이며, 이를 경건한 태도로 가꾸는 것이 도덕적 강박보다 더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니체에게 진정한 친구란 “너에게 가장 좋은 적이 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네가 가장 깊은 곳에서 가까이하지만 동시에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In one’s friend one shall have one’s best enemy…) (14장, “The Friend”)입니다. 이는 피상적인 연대가 아니라 서로를 고양하는 엄격한 친밀감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에게는 항상 고독이 너무 깊습니다. 그 고독이 가라앉지 않도록, 친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The friend of the anchorite is always the third one: the third one is the cork…) (14장)라는 비유에서, 친구는 고독에 빠진 개인이 자기 자신을 잃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를 맹목적으로 동정하거나 감싸주기보다는, 더 높은 목적과 이상을 위해 함께 비판하고 함께 성장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니체는 “각 민족은 자신들의 선악을 정의하면서 유지되어 왔고, 각자의 <탁자>에는 저마다의 가치가 놓여 있습니다” (15장, “The Thousand and One Goals”)라고 설명합니다. 어떤 문화나 시대가 추구해 온 미덕은 서로 상이하기 마련이지만, 인간은 그 안에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인간은 스스로 가치를 매기는 자이며, 그 가치 부여를 통해 세상의 의미를 창조합니다” (Valuing is creating: … Valuation itself is the treasure and jewel of the valued things.) (15장)라고 말합니다. 이는 전통적 선악 기준에 주저 없이 복종하기보다, 각자 스스로 의미를 탐색하고 창조할 수 있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이어지는 16장 “Neighbour-Love”에서는 “너희의 이웃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잘못된 도피일 수 있습니다” (Your neighbour-love is your bad love of yourselves…) (16장)라고 말합니다. 흔히 칭송되는 ‘이웃 사랑’조차도 자기혐오나 자기회피에서 기인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차라리 너희에게 이웃으로부터 달아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Do I advise you to neighbour-love? Rather do I advise you to neighbour-flight…) (16장)는 도발적인 표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할 때, 이웃 사랑도 거짓이 될 수 있습니다’는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니체는 17장 “The Way of the Creating One”에서, “혼자가 되는 길은 결국 자신을 초월하기 위한 길이며, 그 과정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Thou lonesome one, thou goest the way to thyself! And past thyself…) (17장)라고 선언합니다.
그에게 ‘창조하는 이(creating one)’는 기존의 규범과 가치 체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홀로 길을 떠납니다. 여기서 고독과 자기 투쟁은 필수적인 통과 의례처럼 그려지며, “자신의 일곱 마귀를 통해 스스로 신을 창조해야 합니다” (a God wilt thou create for thyself out of thy seven devils!) (17장)는 과장된 표현을 통해 진정한 창조는 스스로를 불태우고 재탄생하는 과정임을 역설합니다.
“왜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여인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18장 “Old and Young Women”의 대답도 흥미롭습니다. “여인은 창조의 본질인 임신을 통해 세상을 이어갑니다”라고 하면서도, “여인은 전사에게 휴식을 주는, 가장 위험한 유희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Woman is for the warrior the most dangerous plaything…) (18장)라고 언급합니다.
이는 여성을 단순히 대상화하거나 폄하하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에너지가 남성과 여성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 상승 혹은 타락할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니체 특유의 수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랑의 맹목이 때로는 위선과 자기기만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경계와 열정 사이의 복합적 감정을 솔직하게 해부합니다.
19장 “The Bite of the Adder”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목을 문 독사의 독이 치명적이라며 슬퍼하는 뱀에게 “용은 뱀의 독으로 죽지 않습니다. 네 독을 거두어 가라” (When did ever a dragon die of a serpent’s poison? … But take thy poison back!) (19장)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진정 강한 존재라면 외부의 공격이나 모욕에도 치명상을 입지 않습니다’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너를 저주한다면, 그를 무안하게 만들지 말고, 작은 분노로 맞서십시오” (19장)라는 구절도 등장합니다. 니체는 무조건 ‘선을 베풀어 악을 이길’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로는 단호한 분노가 자기 보존과 존엄을 지키는 데 필요한 힘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20장 “Child and Marriage”에서는 “네가 아이를 원하는 것은 너 스스로가 이길 자격이 있고, 자유롭고, 너의 미덕에 지배당하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자인가?” (20장)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즉, 결혼과 출산은 ‘자기 극복’의 토대 위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새로운 ‘더 큰 하나’를 창조하려는 의지입니다” (Marriage: so call I the will of the twain to create the one that is more…) (20장)라는 말을 통해, 결혼이 ‘사랑의 낭만’만이 아닌 ‘보다 큰 삶의 목표’를 함께 창조해 나가는 장임을 강조합니다.
니체가 21장 “Voluntary Death”에서 “제때에 죽는 법을 배워라. 그것이야말로 완성에 이르는 죽음입니다” (Die at the right time: so teacheth Zarathustra.) (21장)라고 말할 때, 이는 물리적인 자살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마감할 수 있을 정도로 충만하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너희가 너무 늦게 죽지 않도록 하십시오. 때로는 죽음마저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Not yet have people learned to inaugurate the finest festivals… The consummating death…) (21장)라는 구절에서, 니체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능동적으로 넘어서는 태도를 높이 평가합니다.
마지막으로 22장 “The Bestowing Virtue”에서 니체는 궁극적으로 “덕이란 자기 희생이나 금욕의 미덕이 아니라, 넘치는 생명력으로 다른 존재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베푸는 적극적인 힘입니다.” “금과 같은 고귀함과 밝은 광채를 지닌 베푸는 덕” (22장)이라는 비유를 통해, 고상한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내고 그것을 주위로 흘려보내는 태도를 권장합니다.
“너희의 미덕은 베푸는 것이어야 하며, 그 미덕은 너희 안에서 영원히 광채를 발할 것입니다” (A bestowing virtue is the highest virtue…) (22장)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자기 내면을 풍요롭게 하고, 그 풍요로움을 공동체에 되돌리는 적극적 실천이 니체가 말하는 최고의 덕입니다.
니체가 이런 통찰을 전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인간은 넘어설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전쟁과 전사, 새로운 우상, 고독, 우정, 사랑, 결혼, 죽음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결국 “인간을 넘어선 더 높은 인간 (Superman)”을 위한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통과해도, 끝에 이르면 모든 문이 <자기 극복>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강렬합니다.
(본 글은 [THUS SPAKE ZARATHUSTRA, Nietzsche (1883)]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