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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7. 소리들 속에서

by 타르시아 Mar 24. 2025

오늘 치과를 다녀왔다. 약 십년 전부터 앓아온 만성치주염 때문에  나는 3개월마다 스케일링과 잇몸 치료를 위해 치과에 간다. 오랫동안 받아왔던 치료라 이젠 치과에 가는 것이 딱히 겁이 나거나 무섭지도 않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약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마음의 병을 심하게 앓았고 그렇게 마음의 병을 앓으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고통 중 하나가 바로 ’소리‘ 에 대한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의 감각을 속여왔다. 배가 고파도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며 나를 속였고 누군가가 화내는 소리를 들어도 나는 지금 어떤 소리도 듣고 있지 않는 거라며 나를 달랬다. 그 이유는 주위의 어른들에게 ‘참는 나‘, ‘어른스러운 나‘ 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위의 어른들을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 눈에는 주위의 어른들은 다 바쁘고 힘들어보였고 그런 피곤함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뭔가 죄스러운 것’ 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나의 시도는 역효과를 불러올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감각을 속이긴 했지만 그렇게 속임을 당한 감각들은 내게 ‘감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 으로 복수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때, 나의 몸과 마음을 모두 쏟아야 할 때일수록 그 감각들은 내게 더 처절하게 속임을 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하며 나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 순간이 찾아오면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상의 소리가 대형 스피커를 튼 것처럼 그 소리들이 내 머릿속에 크게 울렸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 식사를 해야 할 때도 배고픔의 감각은 나를 영영 찾아오지 않았다.


위에서 쓴 것처럼 그럴 때마다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소리에 대한 감각이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내 귓가와 머릿속에서 커다란 확성기로 말하는 것처럼 윙윙 울리면서 나의 신경을 건드릴 때마다 나는 결국 나도 모르게 폭발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부모님, 가족들과 싸우게 된 일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직장에서도 그것 때문에 밑도 끝도 없어보이는 분노를 터뜨린 적도 있었다. 다행히, 그리고 매우 부끄럽게도 부모님과 가족들은 그런 나에 대해 화를 낼 때도 있지만 항상 그런 나를 받아주었고 직장에서도 겉으로는 ‘평소에는 전혀 안 그런데 요즘 좀 예민해졌나보지.‘ 정도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한 달 전, 직장을 그만두기 전까지 나는 모든 소리들에 굉장히 민감해있었다. 전화벨 소리, 직장 동료나 상사의 목소리, 가족들의 목소리 등, 그 모든 소리들이 내 머릿속과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울려퍼졌다. 그 소리들은 어떨 때는 끝나지 않는 메아리처럼, 때로는 쩌렁쩌렁 울리면서 내 신경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내가 어느정도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을 때는 그 소리들에 대해 ‘괜찮아, 이 소리들은 모두 매일 듣는 일상적인 소리들이라고.‘ 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 할 수 있었고 일에 온 정신을 쏟을 때는 그 소리들 자체가 아예 들리지 않아 소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에 몸과 마음이 지치고 그러한 여러 소리들에 시달리다가 퇴근을 하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너무 피곤하고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퇴근 버스를 타면 그때부터 소리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같이 탄 일행들 간의 대화, 누군가의 휴대전화 통화에서 나오는 목소리, 버스의 경적 소리, 그 모든 것들이 일로 지친 축 늘어진 나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특히 가장 힘들었던 것은 휴대전화의 통화 소리였다. 평소같으면 그냥 흘려들을 그 통화의 내용들이 내 지친 신경 안에서는 너무나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들려왔다. 특히 그 통화의 목소리가 고통과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으면 더 그랬다.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이어폰을 끼어도 그 소리의 잔향들은 이어폰 안에서 울리는 음악을 뚫고 나의 머릿속과 마음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렇게 집에 들어가도 소리들은 나를 괴롭혔다. 특히 부모님의 대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의 신경은 ‘곤두서는 것의 끝’ 을 향해 달려갔다. 안방과 내 방은 좀 떨어져 있고 나는 집에 오면 바로 방문을 닫아버리기에 그 대화의 내용은 명확하게 들리지 않지만 소리에 대해 이미 곤두설대로 곤두선 나는 그 소리의 성격과 내용을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다.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싸우고 있으면 그 이유가 나 때문인 것인지, 내가 이 나이가 되었는데도 못난 나 때문에 부모님이 싸워야 하는 것인지, 그 명확하지 않은 소리들에 대한 상상 속에서 나는 나에 대한 자괴감을 풍선처럼 부풀리고 있었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소리의 악몽과도 같은 감각은 아주 서서히 사그러들어갔다. 그 악몽이 사그러들어가면서 일상의 소리들과 부모님의 목소리는 내 안에서 천천히 작아져갔고 그 소리들에 신경이 곤두서지 않게 되자 그 소리들 안에서 부풀어올랐던 나의 망상들도 조금씩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나의 감각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감각을 속여왔기에 나는 그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벌을 받았고 그 벌에 대한 대가를 아직도 나는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그러기에 나는 언제나 내가 느끼는 감각을 의심한다. 그리고 그 의심 속에서, 지금은 숨을 죽이고 있는 악몽과도 같은 소리들의 감각은 언제고 내 몸과 마음이 다시 약해질 때 나를 찾아올 것이다.


다행히 오늘 치과에서 오래도록 진료를 받기는 했지만 그 드릴 소리는 내 안에서 악몽처럼 고통스럽게 울려퍼지지는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은 시끄럽고 섬찟한 소리일 뿐,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닌 그냥 소리였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수많은 것들이 피어나는 봄이지만 홀로 메마르고 시들어가는 느낌 속에서 며칠동안 괴로워하던 나에게 유일하게 희망적인 일이었다. 소리를 그저 ‘소리’ 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건 그래도 내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소리들 속에서 소리를 소리로만 받아들이려 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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