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여행 서바이벌

하와이 여행 예능 픽션 스토리

Jul 30. 2023

새로운 여행 예능 프로그램

회의실 안은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회의실 안 긴 테이블에 각기 거리를 두고 앉은 4명은 말없이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림형제는 왼쪽 귀에만 에어팟을 낀 채로 모바일 게임 속 적들과의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잠시 후 회의실 문이 열리며, 우르르 몇 명의 사람들인가가 들어섰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자리 배치가 다시 세팅되었다. 나중에 들어온 무리들은 먼저 있던 우리들을 한쪽으로 몰고 자신들은 반대편에 앉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4 대 4 대형이 형성되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MBS방송국 예능본부 제작진입니다. 저는 제작과 연출을 담당하고 있는 K 피디라고 하고요, 이쪽은 저희 작가님 G, 그 옆에 계신 분은 M 작가님, 그리고 맨 끝에는 저와 함께 하고 있는 T 피디입니다."

입을 뗀 K 피디는 계속해서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며 말을 이어갔다. 아주 좋다. 아이스 브레이킹 따위 하느라 시간 쓰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 평소 생각해 왔던 그림형제에겐 반가운 소리였다.

"이번에 저희가 새로 기획한 프로그램은 여행 리얼리티 예능입니다. 예전에 여행 유튜버들이 출연했던 OOOO라는 프로그램이랑 기본적으로 비슷한 구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이번에는 여러분들과 같은 일반인 참가자들이 주인공이 되시는 겁니다."

"지금 나누어드리는 자료를 보시면 대략적인 구성과 유의하실 사항들이 적혀 있으니 같이 보시면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A4용지 몇 장이 스테이플러로 집힌 종이들을 4명의 출연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종이를 건네받은 즉시 그림형제를 포함한 참가자 4인은 빠르게 종이에는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자, 우선 받으신 자료 첫 페이지에 보시면요, 여행지는 하와이입니다.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숙소와 먹거리, 즐길 거리, 볼거리들을 참가자분들이 직접 경험하시면서 시청자분들에게 소개해주는 방식입니다. 1편은 우선 오아후 섬에서만 진행되고요, 2편부터는 하와이의 다른 섬들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참가자 중 누군가가 탄성이 들려왔다. 방송국 제작비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니 그림형제도 '과연 이게 꿈인가' 싶을 정도였다. 이어지는 작가의 설명에 따라 다음 페이지로 넘기자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쓰여있었다.

■ 프로그램 참가자 진행 규칙

1. 첫 번째 편 '오아후'에서는 4박 5일의 일정으로 진행됩니다. (이후 일정은 별도 안내 예정)

2. 각 참가자에게 인당 800만 원씩 여행 예산이 제작비에서 지원이 됩니다.

3. 참가자 외에 동반인과 함께 여행을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 예산은 800만 원을 초과하여 지원되지 않으므로 동반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 비용은 일부 자비로 부담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4. 지원받은 예산으로 본인이 원하는 항공, 숙소, 관광, 식사, 액티비티 등 일정을 자유롭게 계획하시면 됩니다.

5. 위 제시된 식당, 관광지, 액티비티 중 최소 6개 이상을 직접 체험하시고 시청자들에게 소개해주셔야 합니다.

■ 미션 카드

1. 참가자는 미션이 적혀있는 카드를 무작위로 뽑아 자신이 뽑은 미션 카드에 적혀있는 내용을 수행하여야 합니다.

2. 미션 카드는 총 10장이며 각 카드에 어떤 미션들이 적혀 있는지는 미리 보여드릴 것입니다. 이 중에서 본인의 성향 상 절대로 이 미션만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3가지를 선택하여 제외할 수 있습니다.

3. 이렇게 되면 총 7장의 카드 중 무작위로 1장을 뽑게 되며 참가자들이 뽑는 순서는 관계가 없고, 참가자들 간 중복된 미션을 뽑게 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든 미션 카드는 미션 수행을 이유로 진행 규칙 5번이 면제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방송국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카드에 적힌 미션이라는 것들이 하나 같이 악랄하다. 그래도 3가지는 제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신중하게 어떤 것을 제외할지 따져보아야겠다.

그림형제는 제시된 미션 별로 수행하였을 시 발생할 대미지(Damage)를 예상하여 가장 대미지가 높은 상위 3개를 제외하기로 하였다. 대미지는 10점 만점으로 예상하였다.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도 자신이라면 어떤 것들을 제외시킬 것인지 뽑아보면 좋을 것 같다.

① 사진 & SNS 금지

어차피 인스타그램이나 여타 SNS는 인생 낭비라고 생각하는 그림형제였다. 맛집 식당, 카페에서 찍은 사진 SNS에 올리기 금지법을 만들면 줄 서는 사람들이 없어지니 다들 편하게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을 해본다. 어떤 여행지를 가도 사진을 찍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니 아무 상관도 없다. [예상대미지 : 0]

② 같은 메뉴 only

그림형제에게 음식에 대한 까탈스러움은 없다. 대학시절 미국 여행에서는 돈을 아끼려고 일주일 동안 매 끼니를 버거킹 와퍼로만 해결했던 적도 있다. 게다가 메뉴는 다름 아닌 로코모코가 아닌가. 그림형제의 애정 메뉴이기도 하다. [예상대미지 : 1]

③ 최악의 잠자리

그림형제에게 숙소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침대의 폭신폭신함과 침구의 뽀송뽀송함은 매우 중요하다. 가지런히 정돈된 침대 위로 다이빙한 후 좋은 냄새가 나는 면 소재 베개 커버에 얼굴을 묻고 비비면 그렇게 기분이가 좋을 수 없다. 그런 이불 감촉이 좋아 취침 시에는 가급적 최소한의 옷만 착용해서 이불과 신체의 접촉면을 최대로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딱딱한 침대와 꿉꿉한 침구는 이런 것들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들이다. [예상대미지 : 6]

④ 암흑 체험

그림형제는 암흑 체험을 해 본 적이 있다. 안대로 눈을 가리는 방식이 아니라, 유료 체험관 같은 곳이었는데 실내가 단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가시거리가 0이 된다는 것, 내 앞에 어떤 장애물들이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불안과 공포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손을 잡고 안내해 줄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틀 동안이나 지내다 보면 어느 정도 적응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림형제의 입장에서 이 미션을 수행하게 된다면 DFS 면세점, 알라모아나 쇼핑센터, 상어 케이지를 눈 가리고 하면 되겠다는 계획마저 떠오른다. [예상대미지 : 5]

⑤ 숙소 감금

너무 좋아한다. 제발 이 미션에 걸렸으면 좋겠다. 아무리 하와이라도 숙소에 있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이틀 동안 숙소에서 미쿡 방송(주로 NBA농구나 MLB야구 중계)을 시청하고 룸서비스와 우버이츠로 배달음식 시켜 먹으며 즐겁게 지낼 것이다. 어차피 이틀 후에는 석방될 테니 마음 편하게 하루 종일 뒹굴뒹굴하고 놀면 된다. 숙소 안에서도 OTT, 휴대폰, 책 읽기 등 하고 놀 거리는 많다. 얼마 전 코로나 확진으로 자가격리 했을 때, 그림형제는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와 피로 회복을 경험했었다. [예상대미지 : 0] [에너지회복 : 5]

⑥ 극한 강행군

그림형제의 머릿속에 '여행'이라는 것은 '힐링', '휴식', '회복'이라는 것들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을 와서 몸을 바쁘고 피곤하게 굴리는 일련의 행태를 규탄한다. 그렇게 몸을 힘들게 하고 싶으면 3보 1배 하면서 서울 부산 왕복을 하실 일이지 왜 굳이 비용을 들여 여행을 오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전지훈련 정도의 노동량을 소비하면서 관광을 한 들, 눈에나 들어올까 의문이다. 여행의 본질을 해치는 이런 미션은 절대로 수행할 수 없다. [예상대미지 : 9]

⑦ 옷 한 벌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라는 TV 프로그램에서 기안84가 샤워 후 타월 대신으로 자신이 입고 있던 T셔츠로 몸을 닦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함께 보고 있던 가족들은 그 장면에서 경악하였으나, 그림형제는 그다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만약 이 미션을 수행한다면 매일 저녁 숙소에 돌아와 자기 전 빨래를 해야 하는 성가심은 있겠지만 그 외에 다른 불편함은 예상되지 않는다. 어차피 사진을 찍지 않으니 더더욱 상관없다. [예상대미지 : 1]

⑧ 베이비 시터

그림형제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오로지 피붙이들은 예외지만 말이다. 아기를 보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기저귀 갈기, 분유/이유식 먹이기, 울음의 원인 찾아서 해결해 주기, 뽀로로 동영상 보여주는 동안 밥 먹기, 낮잠/밤잠 재우기, 목욕시키기, 옷 입히기, 유모차 접었다 폈다 들었다 밀었다 다니기, 카시트에 앉히기 등 수많은 세부 task를 수행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task를 실시하려고 할 때 아기가 협조해주지 않으면 아주 곤란한 상황이 되고 만다. 여행지에 와서 시차가 달라진 아기가 너무도 잘 협조해 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게다가 아기가 두 명이다. 그림형제는 이 미션을 수행하다가 순직할 수도 있다. [예상대미지 : 10]

⑨ 쇼핑 금지

그림형제는 쇼핑을 즐기지 않는다. 특히 해외여행을 오갈 때 면세점에서도 딱히 물건을 사는 법이 없다. 원래가 물욕이 없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귀국할 때 회사 같은 팀 동료들한테 줄 간단한 간식거리 정도 사는 것 외에는 별로 물건을 사는 법이 없다. [예상대미지 : 0]

⑩ 묵언 여행

어차피 혼자 가는 여행 아닌가. 그다지 누군가와 말을 할 일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사실 그림형제는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긴 대화를 할 일도 없어 보인다. 다만, 필요한 대화조차도 할 수 없게 하는 이 미션은 다소간의 불편함은 야기할 것 같다. 룸서비스를 위해 전화로 요청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식당과 상점에서도 문자로 소통해야 하기에 불편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시일이 지날수록 익숙해지리라 생각한다. 뭔가 시간이 갈수록 쌓여서 나중엔 폭발하고 마는 그런 건 아닌 것이다. [예상대미지 : 4]

이렇게 해서 미션 카드 10개 중 그림형제가 절대로 이것만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 3가지의 미션을 제외하기로 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어떻게 선택했는지를 살펴보자.

역시 사람마다 성향도 다르듯 선호하는 여행 조건도 제각각이라는 생각을 했다. MBTI 성향별로 공통점도 눈에 보인다. 대체적으로 E성향의 참가자들은 여행의 경험들을 적극적으로 사진으로 남기고 지인들과 공유하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I성향의 참가자들은 여행에서도 적절한 휴식과 힐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이 엿보이는 것 같다. TP형은 실리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형편없는 잠자리는 싫어한다고 선택한 것 같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닌 아기를 보느라 시간을 쓰는 것도 TP의 입장에서는 싫어할 만하다. FJ들은 역시 각자의 느낌을 말로 나누고 소통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성향인 만큼 말을 못 하게 하는 것은 가혹하다 생각하는 것 같다.

당신에게 최악의 여행 조건은?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사람들마다 여행 성향이 다르고, 함께 여행할 때 궁합이 잘 맞는 친구는 따로 있다는 내용의 수많은 콘텐츠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여행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과 충전을 갖는 시간일 것이다. 자신만의 충전 방식으로 즐기고 싶은 욕구를 제한받았을 때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