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음회] 가현의 시 같은 나날, 내 플레이리스트에선 동요가 흘러
나이가 먹었는지 이제 친구들을 만나면 집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한다. 주축은 늘 내가 되는데, 아이들은 매번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햐면 예전의 나라면 집 살 돈 있음 세계 여행이나 하면서 살겠다 말하고 다녔으니까. 진심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방어 기재였다고도 지금은 생각한다.
우리 남매는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 안에 위치한 신설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요즘 아이들이 LH 거지, 전월세 거지라는 단어를 말하며 다른 아이를 놀리는 데 사용한다지. 그리고 그 현상에 놀라는 어른들이 많던데, 나는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집을 입에 올리는 아이들의 분위기를 익히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새 아파트에 살지 않았고, 그 옆 주공아파트에도 살지 않았으며, 하다못해 빌라도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지하도 반지하도 아닌, 일 층이면서 일 층이 아닌, 비가 내리면 짙게 곰팡이가 내려앉는 집에서 살았다. 그게 다가 아니었지. 벌레와 쥐를 극성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니 자세한 첨언은 삼가겠다. 다만 그러한 환경이었으므로 나는 벌레도 잘 때려잡는 보기 드문 여성으로 성장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말한다면, 내 기억 속 아이들은 아니었다. 소수에 속했던 내가 조금의 머쓱함을 견뎌야 하는 상황들이 있었을 뿐, 사실 노골적으로 차별하거나 배척하지는 않았으니까. 가까운 동네에 살던 친구들끼리 등하교를 하게 되었으므로 자연스레 무리 형성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홀로 외로워지는 아이들이 남았을 뿐이라고. 그렇게 합리화했지만, 아이들의 속내까지는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첫 집이 생긴 것은 내가 스물둘, 엄마가 약 이십오 년간 근속하던 회사를 그만두면서였다. 퇴직금을 수령한 다음 해의 일이었다. 영의 개수가 그렇게 많은 건 처음 봤다고, 엄마아빠는 말했다. 그 무렵 우리는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마침 그 집을 발견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세종에 집을 사라는 여러 사람의 권유를 만류하고 어느 동네의 산꼭대기에 자리한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때 세종에 집을 샀으면 어땠을까, 한데 모이면 아직도 화두에 오르내리곤 하지만 가족 구성원 중 누구도 그때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과분한 집이었다. 전에 살던 집에서 정확히 두 배 반이 넓어졌다. 집에 아주 기다란 복도가 있었다. 두 마리의 고양이가 운동장에 놓인 듯 한참을 달리다가 주욱 미끄러져도 좋을 만큼 기다란 복도였다. 부엌에는 냉장고 놓을 자리가 떡하니 있었고, 육 인용 식탁을 놓아도 빼곡하지 않았다. 그 집을 처음 가던 날을 잊지 못한다. 연이 되는 집이 있다는 걸 그때 느꼈다. 전 주인이 떠나고 난 자리에 허겁지겁 우리가 오게 되었을 때, 잠시 마주한 텅 빈 공간이 너무나 커다래서 동생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던 순간에 나는 포근함을 느꼈다. 일 층이라 볕이 내리쬐지도 않고, 조금은 어두컴컴하였지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따뜻함에 압도되었다.
행복했다. 내 부모가 비로소 고되었던 인생의 대가를 얻은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동네에서 나는 소년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다가 곧 떠나오게 되었지만. 그날 우리가 머물던 방의 창문 밖으로 피어난 동백꽃에게 인사했다. 그간 고마웠다고.
소년의 이직으로 상상도 못해봤던 도시 한복판에 걔도 나도 뚝 떨어졌다. 처가살이를 청산하게 된 소년은 조금 후련했을까. 오히려 걱정되었을까. 집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남성들을 볼 때면 나는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혼자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닌데, 그게. 그러나 소년 역시 제 입으로 일반적이고도 스탠다드한 남성이라고 말했던 만큼 보통 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리라. 이쪽도, 저쪽도 마냥 편하진 않았을 거고. 우리는 정말 쥐뿔도 없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때 생각보다 정부가 가난한 신혼부부에게 후하단 걸 알았다. (금리가 지금처럼 올라가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만) 물론 그건 우리가 정말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실질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신혼부부는 많지 않겠다 싶어 안타까웠고, 복지의 수혜를 받을 수 있다는 감사함으로 세금을 성실히 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조건에 맞는 집을 찾아서 나는 손품, 발품을 팔았다. 그게 내가 소년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는 일곱 채의 집을 봤다. 지금 사는 이곳은 마지막 집이었고, 소년과 나는 중개사님께 다음은 더 보지 않아도 되겠다고 말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후덥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놀랍게도 보일러를 틀지 않은 채였다. 웃풍이 없다니. 산꼭대기와 산 밑에 살던 나와 소년이 사는 내내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쏟아지는 햇살은 덤이었다. 받을 수 있는 대출을 최대한으로 끌어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겨우 쥔 것으로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가성비 좋은 집이었다. 주변에 편의 시설이 부족하고 창을 열어두면 기차 소음이 들리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였으나 우리에겐 단점이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그렇게 한겨울에도 흠뻑 볕으로 젖어드는 집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았다. 소년도 나도 집이 아니라 집안의 사람이야말로 인간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일 테지 믿고 살아왔는데, 거기에 공간이 주는 안락함이 더해지면 사람이 진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걸 이곳에서 깨달았다. 내 아이가 안전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다는 게 부모로서 얼마나 안도할 만한 일인지, 그리하여 엄마아빠가 우리를 키우며 느꼈을 슬픔이나 열패감을 원치 않아도 알게 됐다. 두 분은 정말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노력에 비해 더디게 나아지는 상황이 가혹하고, 무척 처절하였으리란 걸. 최선을 주지 못해 차선에 차선을 택해야 했을 무거운 마음을 알아버렸다.
엄마의 이름으로 된 집이 생각지도 못하게 생긴 후에 엄마아빠가 했던 말이 있었다. 손에 쥐뿔도 쥔 것 없이 커봐서 너희가 그때의 우리보다는 덜 힘들게 인생을 꾸려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그리고 거기에 엄마아빠가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언제는 앞가림은 우리가 독립적으로 하라고 하시더니 우리 부모님도 나이가 먹네, 열심히 살면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는 걸 손수 보여준 인생이어서 저는 별로 두려울 게 없다고 대답했는데. 그 말이 엄마아빠 가슴 어딘가 못처럼 박혀있을까, 바람이 솔솔 부는 거실에 누워서 흔들리는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던 날이면 슬퍼졌다.
아직 우리의 것은 없으므로 집이 있는 삶에 대해 소년과 이야기한다. 전셋집을 얻고 나서 기하급수적으로 집값이 올라버려 내 집 마련은 아득해졌지만, 꿈은 꿀 수 있는 거잖아. 다행히 전세 계약을 연장할 수 있었고, 갱신권도 한 번 더 사용할 수 있지만, 마냥 안도할 수는 없다. 나 어릴 적에도 몇 년에 한 번씩 전학을 다녔다. 어린 나는 알 수 없었던 어른의 수고로움을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 엄마가 된 지금은 어딘가 마음에 쏙 드는 곳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이를 데리고 움직일 자신이 없기도 하고. 소년도 직장과 인접한 곳에서 편하게 출퇴근했으면 싶다.
그러나 조건은 참 많고,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지역은 몇 없으며, 그곳들은 값이 꽤 된다. 사람의 욕심이란 다들 비슷한 모양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특히나 아이가 많기로 손꼽힌다. 따라서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라면 엄마아빠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진입하고 싶어한다. 뭐 어느 지역이든 안 그렇겠다만. 머리가 큰 것인지, 솔직히 말하면 소년의 노동으로 일구어지는 자산의 가치가 떨어질 만한 선택을 이제는 할 수 없다. 그의 눈 밑의 다크써클과 검어지는 낯빛을 매일 마주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돈에 무딘 내가 제테크를 공부한다.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 환경이 두 분의 인생을 어렵게 만들었단 걸 지켜봤으므로 나는 놓치고 지나가는 부분들이 없는지, 어딘가 새어나가는 곳은 없는지 면밀히 살피게 된다. 경제권이 나에게 있는 게 아닌데도 찾아본 후 소년에게 일러준다. 집에 대한 정보들은 특히나 수시로 전한다. 친구들은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낯설다고 한다. 나도 내가 이리될 줄은 몰랐다. 아이의 탄생은 나라는 존재를 이만큼이나 바꾸어 놓았다. 혐오하던 세계지만, 결국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로 나를 데려다가 놓았다.
나도 나지만, 사회초년생이면서 머지않은 미래에 가정을 일굴(까!?) 내 친구들의 사정도 만만찮다. 서울살이에 지친 친구들은 집 때문에 지쳐 돌아오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한다. 그러나 무탈하기로 유명한 내 고향, 공무원 집단만 즐비하고 그 외 일자리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지방민의 설움을 누가 알리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집값은 요동치고, 우리는 혼미하다. 몸 붙일 데가 없다는 게 얼마나 서러운 일인데. 언젠가 자기는 어디에도 집이 없어 짐 부리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웠다고, 기숙사에 살던 고등학교 때부터 내 집은, 내 짐은 이 작은 캐리어 하나라 말했던 언니가 떠오른다. 내 사정을 아이에게까지 전가하고 싶지 않아서 딩크족이 되었다던 부부도 알고 있다. 더더 많아지는 추세다. 선우와 준우의 친구들이 사라지는 셈이다. 불안은 우리의 평범한 삶을 망가뜨린다. 서서히, 어딘가 모르게.
뭐 다르냐, 우리가 말 그대로 도시빈민이지,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릴 한다. 처지를 자조하여 유머로 승화시키지 않으면 글쎄, 금세 만기일은 도래하니까. 유례없는 천재지변으로 어떤 생명이 물에 잠겼다. 분명 목숨에 경중을 따질 수 없다 배운 것 같은데, 비 소식이 들리면 세상은 둘로 나뉜다. 진정 공포에 떠는 사람과 그 공포를 짐작조차 못 하는 사람으로. 후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전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빈부의 차이는 까마득한 무지에서 오니까. 어쩌면 그것은 잘못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잘못이다.
집 없는 설움을, 내 집 마련은 고사하고 계단 위로만 올라가고 싶고, 옥상에서 한 칸 아래로만 내려갔음 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알기나 할까. 정부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 미래가 불안하지 않으려나.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만 줄인다. 소리 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까. 무력감이 나를 캄캄하게 만드는 날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름은 청량하기보다는 축축하고, 눅눅했으며 푸르다기보다는 어두침침했다. 그래서 이 계절이 어서 지나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