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음회] 가현의 시 같은 나날, 내 플레이리스트에선 동요가 흘러
거짓말처럼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아이가 하는 일이 있다.
돌멩이를 주워서 주머니에 넣기. 천 바닥의 물이끼가 흔들리는 걸 오래도록 들여다보기. 날리는 머리칼이 얼굴을 가르는 것을 느끼기. 쓰러져 있는 표지판은 왜 항상 일으켜 세운 다음에 제 갈 길을 가는지. 소년은 보여준 적도 없는 행동인데, 어쩜 너같이 구는 걸까 신기해했다.
소년은 차 안에서 우리 모녀가 유난히 빼다 박아 운전에 방해된다고 한다. 겁쟁이 모녀라고. 차창 밖으로 트럭이라도 지나가면 목이 사라지며 움츠러들고, 갑작스레 차선을 변경한 차를 피하려 핸들을 틀면 "아빠-아 선우가 놀랬잖아요 ! 조심해주세요 !!! " 힘주어 말한다. 안전띠에 집착하고, 고속도로에서 차가 평소보다 빨라지면 속도계의 바늘만큼 아이의 데시벨도 올라간다.
바닥이 훤히 다 보이는 다리 건너는 걸 무서워하고, 흔들다리는 꿈도 못 꾼다. 불이 꺼져있는 복도를 앞서 걸으면 몇 번이고 잘 따라오고 있느냐고 살핀다. 트램펄린에서 신 나게 뛰다가 덩치 큰 친구가 오면 혹시 자기가 넘어져 피해를 줄까 슬그머니 지루해진 척 내려오는 모습마저도 전부 나를 닮았다고 한다.
길 위에서 다친 고양이를 만나면 못 지나치고 도와줄 방법을 궁리할 때나 맨날 보는 아빠의 오랜 흉터를 볼 때마다 마음 아파하고 그 위에 스티커를 붙여주는 순간에도 내 얼굴이 덧입혀진다고 했다.
엄마는 손녀를 씻길 때마다 나를 생각한다. 얼굴에 물이 조금만 흘러도 앞이 안 보인다고 팔다리를 흔드는 선우 때문에. 눈에 물이 들어가는 게 무서운 가현이를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번쩍 들어 머리 감겨준 엄마였다. 나는 그때마다 "엄마 살려주세요, 떨어질 거 같단 말예요 !!!!! " 절규했다. 엄마는 선우와 목욕하면서 잊었으면 좋겠을 기억을 매번 소환한다. 지 엄마랑 똑같다고. 나도 선우가 공포에 질린 소리를 낼 때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간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머리가 부딪칠 것 같은 공포의 순간으로, 엄마의 품으로.
나도 아이에게서 나를 본다. 선우는 그네를 타면 자기 발이 동동 떠있는 걸 너무도 무서워한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놀이터 순회의 마지막을 늘 그네로 장식한다. 혼자 탈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선우는 발을 구르고 붕 몸이 뜨면 “엄마아-! 나 날고 있어-어.” 말한다. 아이는 하늘을 안고 있다. 하늘은 바다같고, 중력을 거스르면 물 속에 있는 기분이 된다. 나는 아이가 만끽하는 자유로움을 제일 잘 안다.
공룡 영화가 보고 싶다고 해 '굿다이노'를 틀어줬지만 엔딩을 한 차례도 보지 못했다. 알로와 스팟에게 시련과 위기가 닥치는 시점에만 도달하면 울먹이기에 바빠서 채 끝을 보지 못한다. 공감성수치가 높은 내 유전자도 선우에게 갔는지 공룡이고, 사람이고 캐릭터가 곧 본인이 되어버려서 엄마도 잃고, 바위에 깔린 발을 아파하는 거다. 오감을 예민하게 세운 채로 힘들게 영화를 본다.
생긴 건 스쳐 지나가다 봐도 소년 딸인데 부정하고 싶지만 아이는 나를 많이 닮았다.
오래도록 관성처럼 내가 해온, 나에게 작은 성취감을 안겨주는 소박한 일을 아이도 하는 걸 발견한 날에는 더욱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장면을 만날 때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그 사이에서 소중한 보물을 찾은 듯 탄성을 지른다. 나를 아주 조금 더 사랑하게 된다. 작은 성공이었다.
다시 만나는 기분으로 산다. 유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지금껏 없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어린 가현이를 매일 만나고 있다. 과거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나는 분명 했던 실수를 반복할 것이고, 치기 어릴 테지만 이 아이는 부디 헛발질을 덜 하면 좋겠다. 내 바람이 아이를 발전시키지 못하더라도, 염치없이 아이가 겪을 실패를 몇 개는 털어주고 싶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아빠들이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을 알게 되었다.
“엄마도 엄마가,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서 몰랐어. 미안해."
그말은 틀렸다. 내가 아이에게 저지르면 안 됐을 일을 나는 반복한다. 뱉지 않았어야 할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을. 언젠가 내가 듣고 상처받았던 말을 우리는 모를 수 없다. 상처는 잊지 못하면서, 아이의 모습은 상당 부분 나로부터 기인했다는 건 왜 이렇게 쉽게 잊히는지.
사람이어서 실수를 반복할 수 있지만, 번복은 죄악이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일 말곤 우리의 거짓을 변제받을 방법은 없다. 문장을 변명으로 세우지 않는 게 제일 현명하겠지만, 육아는 언제나 녹록지 않으므로 쉬운 일은 아니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어른이 저지른 잘못을 합리화할 방법은 진짜,
없다.
저마다 차이는 있더라도 아이들이 가진 기억의 창고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영역이다. 아직 남은 공간이, 채울 공간이 많아서인지 촘촘히 새겨져 있더라. 그래서 우리는 더 사려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폭격을 터뜨리고 전쟁을 일으킨다. 평화를 무너뜨린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반복되는 사건사고 속에서 이전의 실패 또는 성공을 토대로 더 나은 선택을 하므로써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라 학창시절 선생님께 배웠다. 인간에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생이 주어지는 것은 같은 이유가 아닐까. 나의 삶을 돌아보고, 어려서 한 실수를 반성하고 개선하라는. 내가 받은 상처를 행하지 않으며 나보다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아이를 보면서 위로받으라는.
혐오를 만드는 정치인이 미디어를 활보하고, 평등 사회를 주장하며 정작 약자가 도달할 수 없는 공정의 기준에는 무감각한 세상이다. 이렇게 주어진 평등이 의미가 있나요, 스스로 좀 공정한 인간이 된 듯 하나요 ? 그리하여 떳떳해졌나요,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던가요 ?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쩌면 시대정신일지도 모르겠다. 당장 나만 해도 너무 나와 같은 이 아이를 미워하고,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로 사랑하고, 그래서 가여우니까. 용기가 없어지는 건 당연하다. 겁나는 일이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이를 낳은 건 정말이지 미친 짓이었다고 가끔 생각한다. 순전히 내 욕망과 욕심으로 태어난 아이가 세상에 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아끼며 살아가도록 키우는 일은 내가 응당해야만 하고, 기필코 해내야 하는 숙제이다. 하지 않아도 눈 딱 감고 손바닥 몇 대 맞으면 넘어갈 수 있었던 한여름의 방학 숙제라면, 그만큼 가벼운 정도의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끝내 아이를 울린 밤이면 생각한다.
오로지 내 등을 보고 자랄 애가 둘이라니, 이게 진실인가 아찔한 날도 있다. 오늘처럼 사람에 치여 마음이 못되게 되는 날에는 눈앞의 현실 말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사랑하는 두 아이의 존재가 차마 거짓이라면 좋겠다고 바라보기도 한다. 이 험한 세상에 감히 꺼내어서 미안해질 때마다 아이를 더 세게 안아본다.
폭닥 안기는 아이들의 작고 귀여운 몸뚱이는 거짓이 아닌 모든 것을 직시하게 한다. 오늘도 안 했으면 좋았을 일을 끝내 참았다. 내 뒷모습은 아이에게 곧 거울이어서 나는 옳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그건 전혀 부담이 아니다. 사랑하므로 기꺼이 나를 닦는다. 묻은 때를 지워내면서 나는 투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