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부터 회계법인 설립까지
0. 첫 직장
빅 4(삼일, 삼정, 안진, 한영) 회계법인은 2차 시험 결과가 발표되기 전 8월쯤 신입회계사 채용면접을 시작한다. 나는 2010년에 회계법인에 지원을 하였다.
작년에는 리만브라더스 금융위기의 여파로 빅 4가 신입회계사 채용규모도 줄이고, 초봉까지 삭감하기도 했던 시절이라.. 나름 채용 한파가 있던 시기였지만, 어찌어찌 빅 4중 2개 회사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고, 풀링 시스템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회계법인으로 입사하였다.
회계법인 입사 전에 사전에 2주가량 실무연수를 받기는 했지만, 사실상 첫 출근은 내가 일을 하게 될 본부에 발을 들인 날이었다. 나는 본부를 선택할 때 택스본부를 지원을 하였다.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회계법인과 본부까지였고, 택스본부 내에서 어떤 팀에 배정되는 것은 복불복이었다.
택스본부는 팀으로 운영되었는데, 내가 배정받은 팀은 1명의 파트너 아래, 디렉터 1명, 시니어 매니저 직급 3명, 매니저 6명(으로 기억), 시니어 5명, 스텝 (나포함) 2명으로 구성된 팀이었고, 소문으로는 상당히 일이 많은 팀이라고 했다.
그 소문은 사실이었고, 소문보다 더 바쁜 팀이었다고 느꼈다.
택스본부도 감사만큼은 아니지만 클라이언트 회사에서 용역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필드(클라이언트 사무실을 보통 필드라고 부름) 나가서 6시까지는 필드로 나간 회사 업무를 위해서 인터뷰를 하다가 회사 사람들이 회의실에서 사라지면 이전에 나갔던 필드 업무를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전화통화 소리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나는 조용히 선배들 업무 옆에서 아주 간단한 자료 정리를 하면서 누가 먼저 퇴근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눈치 보느라 퇴근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왜 회계사님 퇴근 안 했어요?라는 말을 들으며 같이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1. 첫 출장의 악몽
입사하고 한 달 후 머리수 채우는 용도 외에 쓸데없던 내가 3년차 선배와 함께 지방에 있는 회사의 세무조정 어싸인이 되었다.
한국의 대다수 회사는 12월 결산법인이라서 세무조정을 다음 해 3월까지 신고를 하는데 이 회사는 특이하게 8월 말 법인이었다. 법인세 신고기한이 11월 말이라서, 시기상 신입회계사 교육에 안성맞춤인 회사였다.
3년차였던 그 선배도 지금 생각해 보면 만 2년 경력의 회계사일 뿐이었는데, 그래도 아우라가 느껴졌다. 책임감이 강하고 진중함이 있는 뭔가 무섭게 느껴지는 그런 선배였다. 이제 갓 3년차가 되었으니, 선배도 세무조정 인차지 역할은 처음 해봤을 것이다.
처음 하는 세무조정이라서 몇 년간 공부했던 내용이 모두 증발해 버린 듯 어리버리 되기 일쑤였고, 어떤 자료를 요청하고, 질문을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저녁에는 지방 거래처답게 거친 술자리는 시작되었고, 술자리에서야 회계사다움을 선보이며 주는 술잔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고.. 그렇게 1박 2일 짧은 출장을 마무리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세무조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세무조정계산서를 만들어서 전자신고를 해야 하는데, (아직도 미스터리인 것이) 빅펌이라는 곳이 이걸 엑셀로 작성했다. 물론, 엑셀로 작성하는 장점도 있긴 하지만, 서식을 잘못 건들면 그야말로 헬게이트가 열리고, 엑셀에도 미숙하고, 세무조정계산서 서식이 뭔지도 모르는 내가 너무 큰 실수를 반복했던 탓에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내 잘못이니 밤을 새워서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문제는 3년차 회계사가 본인은 리뷰를 봐야 하니 시간은 신경 쓰지 말고 리뷰를 올리라고 했다.
뭐, 나를 괴롭히려고 그러나 생각도 들었지만 상사의 명령이고.. 듀데이트를 못 맞춘 것도 나였기 때문에 알겠습니다라고 하고 자리로 돌아와서 문제를 수습하려고 했는데 진짜 실수가 계속 나왔다.. 그 선배는 다른 업무에도 어싸인이 된 상태라서 항상 바쁜 사람이었는데, 새벽 몇 시가 되던 리뷰를 칼같이 보고, 설명을 해주고 다시 일을 시켰다.
나 때문에 퇴근하지 못하고 누굴 기다리게 하는 것만큼 큰 고욕이 없었다. 자존심도 상했고.
이 모든 것이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참기 힘든 시간이었다.
나중에 나도 후배 회계사가 생겼고, 신입회계사를 데리고 세무조정을 많이 나갔다. 최대한 자세하게, 내가 가진 자료도 다 넘겨주었지만, 절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 있는데.. 그 후배가 업무를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려서 리뷰를 보고 다시 리뷰를 낸 적은 없다. 그만큼 그 과정이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첫 출장에서 반복하던 실수를 그냥 지나치고 선배가 업무를 그렇게 끝내 버렸다면, 아마도 내가 그렇게 빨리 적응하고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그 선배를 내 동료로 점찍었을지도 모른다.
2. 첫 이직과 재회
회계법인에서 회계사들은 수습기간 2년이 끝나는 시점에 Associate에서 Senior Associate으로 대부분 승진을 한다. 나도 승진을 하였고, 예전보다 많은 일, 복잡한 일에도 말단이지만 참여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때쯤 택스본부에 우리 팀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우리 팀 파트너가 빅4 중 한 곳으로 이직을 한다는 소문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 소문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파트너 혼자 옮겨서는 일을 할 수 없으니 파트너가 우리 팀에서 데려갈 회계사를 간택하는 느낌으로 연쇄이동이 일어났다. 아마 높은 직급들끼리는 팀단위로 회사를 옮기려고 하는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2년간 정들었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나는 계획에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서운하기도 했고, 새롭고 채용된 경력직들 대부분이 세무사였는데 미묘하게 신경전도 생기면서 팀 분위기도 매우 어수선해졌다.
그래도 바뀐 상황에 적응을 하는 중이었는데, 이직한 팀에서 연락이 왔다. 같이 일해보자고..
며칠 고민을 했지만, 새로운 회사에서 제시한 사이닝보너스와 인상된 연봉을 듣자 외벌이에 두 돌도 안된 아들을 생각하며 이직을 결심했다.
이직한 회사는 분위기가 달랐다. 분위기가 팀으로 운영되지 않아서 그런지, 개인주의적 성향이 더 강하고, 야근을 덜하고, 워라밸을 더 신경 쓰는..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뭔가 분위기가 덜 공격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옮긴 팀으로 이직을 한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업무 방식으로 같은 사람들과 일해서 새로운 회사에 적응에 시간이 필요가 없었다.
이직하고 한 달이 지났을까? 첫 직장에서 같이 근무한 선배가 다시 팀으로 조인하였다.
그 선배는 원래 우리 팀 소속은 아니었고, 다른 빅4에서 근무하다가 업무의 확장성을 위해서 로컬택스 업무가 많은 우리 팀으로 이직을 하면서 조인을 했는데, 때마침 나도 그때 입사를 했던 것이다.
팀입장에서는 새로운 멤버였던 것이다. 나는 1년차 그 선배는 매니저연차였으니, 4-5년쯤 경력 차이가 있었다. 연차 차이가 있어서 처음부터 친했던 것은 아니었고, 이직한 회사에서는 예전보다는 일을 많이 하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개업에 대한 호기심이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선배가 이야기해 주는 생생한 경험담이 너무 재밌었고, 선배도 야생의 경험담을 전해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직한 회사에서 3년 반정도 근무를 했는데, 독립된 팀으로 운영되다 보니 시니어 직급 회계사 충원이 쉽지 않았다. 신입회계사도 우리 팀에 배정이 되었으나, 잘 적응을 하지 못하고 퇴사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는 막내역할부터 인차지 역할까지 하는 용역도 있고, 막내부터 중간 역할까지 할 때도 있고, 그 경계선이 모호해져 갔다. 업무에서의 역할만 모호해진 것이 아니고 업무적이었던 선배들과의 관계도 돈독해졌다.
특히 개업 경험이 있던 선배를 통해서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고,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주고,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형성과 유지, 올바른 성과 배분 등 개업에 필요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라도 동료로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3. 헤어질 결심
이번에도 우리 팀에 소문이 돌았다.
파트너가 이번에는 진짜 개업을 한다는 이야기였고, 이미 같이 개업할 멤버도 정해졌다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첫 직장에서의 이동, 이직한 회사에서의 팀 운영 방식, 어싸인 등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이번에도 나는 같이할 멤버가 아니었고, 이번에는 정말로 이들과 헤어지고 독립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간택되지 못한 사람은 나뿐만은 아니었다. 간택되지 못한 자들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하나둘씩 퇴사를 하였고, 나도 사직서를 제출하며 내 월급쟁이 인생을 마무리하였다.
두 번 다시 타인의 결정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리라는 결심을 하면서.
4. 동료가 되었다
회계사가 개업하는 방식은 개인사업자로 하거나 회계법인을 설립하거나 그 소속 회계사가 되는 방식이 있다. 다만, 회계법인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자본금 5억원과 10명의 공인회계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법인 설립하는 것은 초기에는 불가능에 가깝다.
공인회계사법
제26조 【이사 등】 ② 회계법인의 이사와 직원 중 10명 이상은 공인회계사이어야 한다.
(동 규정은 2024년 1월 16일 이후 공인회계사 인원제한이 10명 이상에서 7명 이상으로 완화되었다.)
제27조 【자본금 등】 ① 회계법인의 자본금은 5억원 이상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처음에는 개인사업자를 짧게 운영하다가, 신설회계법인 중에 회계사가 부족한 곳에 여러 조건(사무실 이용료, 로열티 등)에 합의한 후에 조인하였다.
아무리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도 셋방살이는 서러움 법이다.
비슷한 시기에 모두 개업을 해서 그랬을까?
간택받지 못한 자들의 아픔이 있어서 그랬을까?
예전 팀에 있던 선배들이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모임의 주제는 회계법인 설립이었다.
셋방살이를 끝내고 우리만의 회계법인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기반으로 상대에 대한 대한 파악이 끝난 상태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위에 3년차 선배, 개업 후 돌아왔던 선배와 내가 셋이서 50% 지분을 출자하고 믿을만한 다른 회계사들도 모집해서 2017년 가을에 지금의 회계법인을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세 명은 방을 나란히 쓰고 있고, 회사로 출근하는 날이면 항상 식사를 같이 하고, 같이 할 업무가 생기거나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찾아서 의논을 한다. 혼자서 할 수 없는 프로젝트에서는 협업할 수 있고,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든든한 자산이 된다.
원피스 만화를 보지는 못했는데, 주인공인 루피는 해적왕이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데, 뛰어난 동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면 "너, 내 동료가 돼라"라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빅펌에서의 6년정도 시간은 좋은 동료를 찾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좋은 동료를 만나서 나 또한 성장했다고 생각하고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후일담
법인 설립 후 몇 년 뒤 파트너와 함께 개업했던 선배들 중 일부가 우리 법인으로 조인하였다.
사람 뒤통수 치는 그 습관은 못버리는구나 싶었다. 역시는 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