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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세 번째, 친구

by Taylor

지금은 새벽 1시다. 늘 그렇듯 나는 잠을 이루지 않고 글을 위해 침대에 걸어서 앉아있다. 밤을 열어젖힌다. 매미가 어찌나 우렁차게 우는지, 셀 수 없이 많은 쌀알들이 비처럼 내리는 장면을 상상하며 글을 써 내려가본다.

소제목을 짧은 단어 하나로 정했다. 친구 말이다. 실은 이 단어가 내겐 아주 무거운 주제라는 걸 고백해 본다. 또 잠 못 이루는 새벽이면 항상 친구를 생각했다는 것을. 그렇기에 세 번째가 돼서야 이 주제를 꺼낸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길게 인내했다. 이 글을 쓰기 전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나는 단 한순간도 친구를 잊은 적이 없다.

친구란 무엇일까? 나는 새삼스럽게 묻는다.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이것이 국어사전의 답이다. 그러나 내겐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한순간도 맘 편히 생각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평범한 듯 독특한 인물이었다. 모두가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가. 나는 남들과 다른가? 분명 나는 달랐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남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나는 나라고, 남들과 같아져야 할 이유는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던 것이다. 그래서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 노력해 왔던 부분들도 없지 않아 있다. 어제와 그제 설명했던 내 독특한 취향들도 그 예이다. 남들과 다름을 때론 자부심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지금 보면 꼴 보기 싫은 것들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구에 대해 심하게 걱정해 왔다. 나는 늘 친구가 없었기에, 외로움이 극에 달한 것이다.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구가 없는 것도 누군가에겐 크나큰 이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내게 적용되었을 때, 나는 극심한 불안함에 허덕였다는 것이다.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노는, 그런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나는 평생을 갈망해 왔지만, 그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이미 한참 전에 깨달았다. 다 커버린 어른에게는 친구가 별 대수냐만은, 어린 소년이었던 내게 친구란 세상을 의미했다. 그런 자그마한 세상조차 없이 나는 한평생 비틀거렸던 것이다. 그렇게 밤이 되면 나는 그것을 놓지 못한다.

중학교에 들어 나는 그래도 친구들 몇 명을 사귀었다. 이 얼마나 달콤했는가. 그때 나는 분명 행복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갈망했던 친구라는 자그마한 소원을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성취했던 것이다. 지금 떠올리는 일은 내게 있어 매우 불편한 일이다. 지금은 그것들을 생각하며 훌쩍이진 않지만, 어린 나는 얼마나 울었던지. 곤욕스러움을 꾹 참고 나는 그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어진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런 것들이다. 친구를 사귀고 친구를 좋아하고 친구와 놀다가 친구와 싸우고 친구와 헤어지는, 간단하고 누군가에겐 시시한 일들. 그러나 나는 그때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었더랬다. 작지만은 않은 다툼을 겪고 나는 감히 화해를 상상했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이미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너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연신 사과하는 어린 내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마음이 저려온다. 내가 그날 얼마나 많이 미안해라고 말했던지, 아마 1년 동안 한 사과의 절반을 그날에 쏟아붓지 않았었나 싶다. 사춘기 소년에게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얼마나 쓰라린 일인지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고 아직까지 그 아픔이 생생하다.

그 녀석들은 어떻게 살까? 나는 혼자서 그런 생각을 종종, 혹은 자주 했다. 나는 그들을 지독히 원망했다. 함께 해왔던 모든 것들을 마치 한 손으로 쓰레기 통에 버릴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그 어린 녀석들에게 나는 무얼 바랐던 건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또 얼마나 어렸던가. 모두가 어리고 미성숙했던 것이다. 모든 일이 버거웠던 것이다.

내가 용서할 수 있는 입장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을 용서할 테다. 날 때부터 나는 용서를 쉽게 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늘 착하다고 생각해 왔다. 지금 생각하면 귀여울 따름이다. 착한 내가 널 용서해 주지. 그 아이들, 혹은 그 인간들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누가 누굴 용서해. 그 아이들은 꽤 공격적인 성격을 지녔었기에.

만약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면서 이런 썩 기분 좋지만은 않은 일들을 꺼내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이 궁금하다면 이제는 그에 대한 답을 할 시간이다. 나는 잠 못 드는 새벽에는 항상 친구를 생각한다. 그러나 친구를 생각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생각한다는 것이고, 어린 시절의 친구를 생각한다는 것은 곧 어린 나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툭하면 울고 연약했던 어린 나를 나는 새벽만 되면 놓을 수 없다. 의기소침한 그 어린것을 나는 안타까워하며 추억하고 잠을 더 멀리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소제목을 어린 나가 아닌 친구로 설정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 내 인생은 항상 쓸쓸하고 외로웠고 거기서 이어지는 것이 바로 친구에 대한 갈망이다. 친구가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어린 시절 어린 나에게 친구란 외로움의 도피였더랬다. 그런데 그마저도 잘 풀리지 않았던 그 소년의 쓸쓸함을 떠올리는 것이다. 꼭 친구뿐만은 아니다. 우리는 항상 모든 외로움에서 탈피하려 노력하지만 실패하기 일쑤다. 항상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내게 외로움은 서서히 진행되는 메마른 죽음이다.

내게 있어 외로움과 연결되는 단어는 친구이다. 아이러니하게 나는 친구 탓에 외로웠고, 친구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떨쳐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를 떠나던 친구, 나를 혐오하던 친구들, 나를 욕 하던 친구들. 그들은 친구가 아니야, 하고 누군가 말해준다면 나는 반가워하며 답하겠다. 제겐 그들 말곤 친구가 없었는걸요. 따라서 앞서 던진 친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제게 있어서 친구는 나를 아주 지독하게 외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항상 사랑을 강구하는 나. 외롭고 애틋한 밤이 되면 나는 사랑을 강구하고 외로워하기에 어쩌면 그 어리고 외로운 소년에게 더 큰 공감과 위로를 느끼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이번엔 내가 네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그러나 쉽지만은 않다. 과거는 밤에 피어나 밤에 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없이 사랑을 강구하다 지쳐 잠이 드는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마치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투의 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의 사랑의 부재는 여전히 크게 남아있는 구멍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진정한 친구를, 진정한 연인을 상상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잃는 일을 상상하는 것 역시 내게는 당연한 일이다. 나는 잃어보았고 곧 잃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사랑하는 이는 없다. 친구와 연인을 수차례 잃을 것임에도 우리는 어째서 사랑을 하는 것일까. 나는 앞으로 이 짤막하지만 분명 진중한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리라고 예상한다. 그렇기에 오늘 섣불리 답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그저 따뜻한 우유, 편안한 침대, 안락한 전등, 나를 편안하게 해 줄 책 더미들, 그리고 친구를 나는 조용히 상상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외로움을 달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면 오늘 밤은 분명 지독한 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외로움으로 둘러싸인 밤. 그렇기에 나는 끊임없이 백일몽에 젖어든다.

그리고 사랑을 시작하자. 나는 그렇게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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