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인생○○
지금은 새벽 2시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두 번째 밤의 포문이 열리고야 말았다. 어젯밤은 안 자려고 노력한 부분이 컸다면 오늘은 왜인지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을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쓴다.
어제와 동일하게 선풍기가 시끄럽게 돌아가는 탓일까? 그러나 나는 이 무더위에 선풍기를 포기할 수 없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멀리 달아난 잠과 손님처럼 다가온 생각을 나는 찬찬히 정리하였다. 그러다 인생이 붙는 재미난 말들을 떠올렸다. 인생 영화, 인생 책, 인생 곡.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고 인상적인 것들 앞에 붙여준 '인생'이라는 단어가 재밌던 것이다. 오늘 밤은 이 재미난 단어, 인생으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나이를 공개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인생을 논하기엔 너무나도 어린 탓에 실은 이 주제를 꺼려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뭐 어쩌겠는가. 이미 끄적여온 짤막한 문단들을 지우고 다시 쓸 여유는 없지 않은가? 또 이렇게 나는 그럴듯한 핑계로 이 주제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생○○라고 내게 던져진 빈칸을 채워야 한다면, 나는 단연 책부터 채워 넣겠다. 두 칸이라고 누군가 딴지를 건다면 도서라고 맞받아치겠다. 무튼 내게 있어 인생 책은 해변의 카프카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그 책을 읽기도 전에 그 책에 빠져들었다는 것, 그리고 읽고 난 후에는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이 내 인생책이라는 근거가 되겠다. 어려운 문장들과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책을 사랑한다.
소년 다무라 카프카는 15살 생일에 가출을 하게 된다. 가장 터프한 15살 소년. 그의 길고 험난한 여정기를 읽어내며 내가 느꼈던 어떤 희열감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을지, 나는 벌써부터 막막하다. 그러나 감히 문장들을 적어 나가겠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소설인 해변의 카프카 속 소년 카프카는 가출을 하게 됨과 동시에 온갖 괴상한 사건들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또 다른 인물 나카타 씨는 어떤가. 고양이와 말을 하는 이상한 노인. 그렇게 카프카는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험난한 것들을 겪으며 성장해 나간다.
그 책을 내가 15살에 접했다는 사실은 어쩌면 운명과도 같다. 그 책을 사랑해야 하는 운명이 내게 주어졌던 것이고, 나는 그 운명을 기쁜 마음으로 따르고 있다. 단순히 주인공이 15살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철저히 15살이다. 어느 나이 많은 어른의 손에서 끄적여진 상상의 존재가 아닌, 때로는 피부에 여드름이 나기도 하고 땀 냄새가 나며 키는 어중간하고 자세가 구부정하며 수줍음 가득한, 살아 숨 쉬는 15살 소년이다. 그에게서 느낀 친밀감 혹은 동경심은 내가 그 책에 빨려 들어가도록 만들었고, 나는 그곳에서 나올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다.
인생곡은 어떠한가. 나는 고민을 멈출 수 없다. 나는 어젯밤에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수줍은 마음으로 소개한 테일러 스위프트의 곡과 그렇지 않은 곡 사이 아주 진중하게 갈등하였다. 그러다 고른 곡이 있다. 바로 Defying Gravity이다.
본래 뮤지컬 위키드(Wicked)의 넘버인 이 곡은 내가 듣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곡이다. 내가 뮤지컬 위키드를 뮤지컬이 아닌 영화로 처음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읽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 혹은 당혹감을 자아낼까 걱정이다. 영화라고 해봤자 개봉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인생곡이라고 칭할 수 있냐는 질타를 받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래를 알아가는 데 있어서 노래를 들은 지 얼마나 오래되었지는 중요치 않다. 진정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들었는 가 같은 것들이다.
이 위키드라는 작품은 오즈의 마법사 세계관에서 착안한 프리퀄 작품으로 선과 악을 비트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출간직후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뮤지컬화, 영화화되며 많은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특히 뮤지컬과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넘버는 바로 이 곡 Defying Gravity이다. 이 곡은 서쪽 마녀 엘파바가 에메랄드시티를 떠나기 직전 그녀의 친구 글린다에게 작별을 고함과 동시에 자신의 신념을 위해선 나쁜 마녀라는 오명 따위도 개의치 않겠다는 엘파바의 강인한 의지가 담긴 곡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나는 왜 감히 이곡을 내 인생 곡이라고 꼽았는가. 엘파바는 날 때부터 초록색 피부를 지니고 죽을 때까지 외로움 속을 살아온 인물이다. 비록 진정한 친구를 만났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녀와의 이별은 또 얼마나 애절했는가. 이 작품 속 엘파바의 지독한 고독은 우리 모두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강인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 누구도 그녀를 끌어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그녀가 모두 그녀를 비난하고 죽이려 드는 이 끔찍한 상황 속 그 누구보다 우뚝 솟아오르며 우렁차게 노래하는 곡이 바로 이 곡인 것이다. 나는 이 곡에 빠져들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었다.
인생 영화만이 나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 또한 고민을 아주 지독하게 했다. 나는 주저하다 답할 것이다. 나의 인생 영화는 인터스텔라이다.
압도적인 영상미라던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라던지 하는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 블랙홀 가르강튀아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이 작품을 본 모든 관객들의 정신은 가르강튀아에 빨려 들어갔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결말 탓에 이 작품을 인생 영화라 꼽은 것 같다. 브래너 박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블랙홀에 내 더진 쿠퍼는 모든 비밀을 밝혀내고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 특히 나이 든 머피와의 재회는 보는 이로 하여금 크나큰 감동을 선사한다. 그러나 브래너는 어떠한가. 그녀는 홀로 남겨진다. 그녀가 산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인가. 누군가를 원망할 것인가, 추억할 것인가. 지독한 우주적 공포 속 그녀에게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는 어떤 것인가. 이 아이러니함, 쿠퍼와 브래너의 엇갈린 운명과 우주의 잔인함. 나는 그 고요한 일렁임에 빠졌다.
극적인 ost는 나를 우주 저 멀리로 보내기에 충분했다. 아름답지만 섬찟한, 이 영화의 줄거리를 담은 이 음악에 매혹당하지 않는 일은 쉽지 않다.
글이 길어지고야 말았다. 밤은 서둘러 나를 재촉한다. 그러니 이 글의 매듭을 지어볼까 한다.
단순히 나의 취향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적은 것이 아니다. 인생, 그 지독하게 외로운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런 보호 없이 삶에 내던져진 15살 다무라 카프카는 얼마나 고독한가, 군중들 모두가 입을 모아 외치는 사악한 마녀 엘파바의 비행은 얼마나 쓸쓸한가, 브래너에게 이 광활한 우주는 얼마나 잔인한가.
밤이 되면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행히도 그 누구도 지켜보고 있지 않고 불행히도 그 누구도 곁에 있지 않다. 쓸쓸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왁자지껄했던 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지금은 얼마나 고요한가 생각하게 된다. 산 날보다 살 날이 많겠지만, 그 남은 날들은 얼마나 쓸쓸할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떠날 것인가. 사랑을 해본 모든 이들은 상실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안다. 우리는 긴 인생동안 끝없이 사랑하고 끝없이 아파해야 하는 것이다.
밤이 되면 떠나간 이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들이 정녕 떠난 것일까? 어쩌면 이 어두컴컴한 어둠 속에 침입해 있을지도 모른다. 무방비 상태인 나를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는 또 얼마나 그들을 원망하는가. 이미 지나간 일에 얼마나 집착하는가. 그 집착 탓에 어떤 것들을 놓쳤던가. 그렇게 밤에는 끊임없이 과거가 피어난다. 그야 아침엔 현재가 바쁘게 쫓아오니 과거가 설 틈이 없는 것이다. 과거는 밤에 아주 얕게 침투해 순식간에 잡아먹는다.
밤은 거의 닫힌다. 눈꺼풀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전등을 끈다. 매미가 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쓸쓸함에게 안길 때.
그렇게 인생은 쓸쓸한 것이기에 내게 있어 인생○○은 항상 쓸쓸함을 비추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외로움에 취해 한참을 생각하다, 밤은 그렇게 닫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