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우울과 권태
지금은 새벽 12시 30분이다. 발을 의자에 걸치고 상반신은 침대에 맡겨두고는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중이다. 다가올 내일의 아침을 생각하며 말이다.
그러나 더 이상 길게 말할 힘이 없다. 오늘의 주제는 우울과 권태다. 어쩌면 힘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지금 우울과 권태에 사로잡혀 내가 무얼 쓰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씩 끄적여보는 중이다. 이걸 읽을 누군가를 위해서 말이다.
항상 나를 휘어잡는 우울은 어떠한가.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하는지, 건조하고 시큼하게 하는지 나는 잘 안다. 나는 내가 그렇지 않은 걸 알면서도 우울증인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했더랬다. 그러다 우울증 환자는 본인이 우울증인지를 인지할 수 있는지 의심했다.
일단은 네이버를 찾았다. 이렇게 친절한 이웃이 나를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당장 우울증을 검색해 짧은 문항 아홉 개를 빠르게 훑었다. 나에 해당되는 말들이 꽤 많았다. 잠은 늘 없었고 밥은 늘 맛이 없었다. 때론 내가 얼마나 미웠는가. 나는 점점 스스로를 의심했다. 나 우울증인가 봐, 어떡하지? 짐짓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다 마지막 문항에 도달했다. 삶이 무기력하게 느껴지거나 자해, 자살 생각을 하신 적 있나요?
그 문항을 읽고 나는 네이버를 껐다. 가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단 한순간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적 없었다. 물론 공포의 섬찟함은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나는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해 왔다. 단순히 차를 타고 간다던가, 침대에 누워 있다던가, 하다못해 살아있다면 언제나 죽을 수 있다. 명쾌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나는 알았다. 내가 죽음을 생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생각함과 동시에 두려워했기에, 내가 손목을 그어버릴 일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항상 알았다. 나는 살고 싶었다.
항상 살고 싶었기에 항상 기뻤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끝없이 우울과 불안에 사로잡히고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러 왔던가. 그래선 안 됐지만 나는 우울이 사로잡혀 수많은 실수들을 저질러 왔다. 우울하다는 이유로 남들에게 얼마나 모질게 굴었던가, 남들이 버티지 못할 만큼 기대진 않았던가. 쌉싸름하게 기억해 본다, 후회해 본다.
그러다 자기 연민에 빠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네가 얼마나 불쌍한 아이인데, 사람들은 너를 왜 몰라줄까. 이 불쌍한 것아, 나는 네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미치겠다. 물론 그래선 안 됐던 거지만. 또 그걸 그때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으리란 걸 안다.
책을 한 권 읽었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책 말이다. 하루키를 언급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다. 짧은 문장 하나를 소개해볼까 한다.
"자신을 동정하지 마. 자신을 동정하는 건 저속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실은 이 문장을 아주 오래전에 접했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자신이 고귀하고 존엄한, 고급진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굳게 믿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자기 자신에게 저속하다고 말하는 이의 말을 듣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나는 분명 알았다. 저 문장을 끝까지 새겼어야 했다. 나는 지독한 자기 연민 중독자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저 문장이 매우 뼈가 있다고 칭찬하며 잘난 체했을 뿐이지 저 문장의 진정한 의미는 새기지 못할 정도로 멍청했던 것이다.
내가 어디가 저속해. 내가 불쌍한 건 사실이라고. 그렇게 자기 연민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져 어떤 짓들을 저질러왔는가. 그렇게 우울에 깊게 빠지다 보면 어느 날 삶의 이유를 흔적도 없이 잃어버릴까? 우울은 사람들마다 너무나 다른 이유를 가지고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우울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의 모습은 얼마나 소름 끼치게 동일한가.
나는 권태도 그런 우울에게서 왔다는 생각이 든다. 우울의 또 다른 모습. 모든 일에 싫증이 나버렸다. 밥을 먹는 일에도, 글을 쓰는 일에도, 책을 읽는 일에도, 대화를 나누는 일에도, 게임을 하는 일에도, 노래를 듣고 부르는 일에도 나는 어떠한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시간이 아깝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별다른 행동을 한 건 아니다.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가,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게 단지 누워있었을 뿐이다. 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 지루하고 무의미한 날들을 지탱하려 나는 왜 힘을 쥐어짜 내야 하는가.
나는 철학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언이 아닌 정도가 아니다. 나는 철학을 전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래전부터 남모르게 철학을 동경해 왔다. 철학, 물론 이름이 멋있어 보여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어쩌면 현명하다는 이들이 줄줄이 고민해 온 난제에 대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의 이유는 무엇인가. 살아가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린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모두에게 나름의 삶의 이유가 있을 테지만, 내게는 그런 이유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단지 살아있으니까, 살고 싶으니까, 나아가 죽기 싫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다른 이들도 그래왔을 테다.
이별과 고통 따위가 삶을 얼마나 힘들게 만들어왔는지 나는 안다. 어쩌면 삶은 그 자체로 힘든 것이기에, 어떤 이는 신세를 한탄하고, 어떤 이는 자기 연민에 빠지고, 어떤 이는 결심을 할 테다. 단호한 결심을 말이다.
나는 삶의 이유를 되려 아주 사소한 데에서 찾으려 노력하기도 했었다. 달달한 딸기잼을 바른 토스트를 먹기 위해서, 따스한 아침의 햇살을 맞으며 일어나기 위해서,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다정하게 대화하기 위해서, 재미있는 책을 읽기 위해서, 좋아하는 노래를 듣기 위해서, 기분 좋게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 아이스크림을 아주 천천히 녹여 먹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 거대한 우울과 고통 앞에서도 꿋꿋하게 고개를 쳐들고 삶을 지탱할 수 있을지 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나는 위대하지도, 현명하지도 않기에, 이 꼬리에 꼬리를 날카로운 의문들을 대답해 낼 능력이 물론 없다. 삶이 얼마나 우울하고 권태로운지조차도 나는 훌륭한 작가들이 해왔듯이 묘사해 낼 능력도 없다. 한없이 작아지고야 만다. 멍청한 자기 연민의 뒤에는 끝없는 자기혐오가 기다릴 따름이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대담해지려고 한다. 불완전하게 써 내려가보려고 한다. 나는 감히 삶을 정의 내려보려고 한다. 남들보다 턱없이 짧은 인생을 보냈고, 현명한 이들이 받는 훌륭한 교육 따위에는 관심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무지한 내가, 그러나 삶을 너무나 사랑하는 내가, 살아가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정의 내리려 한다.
끝없이 우울하고 끔찍하게 권태로운 일상 속 이별의 고통에 짓눌리는 우리에게는 끝없이 태어나는 새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는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항상 나는 글의 끝을 있어 보이게 마무리하려 사랑을 끼워 넣곤 했다. 얼마나 서투를지 굳이 깊게 상상하지 않아도 알 테다. 물론 끔찍하고 부끄러운 것들이다. 그러나 오늘은 나를 압도하던 기나긴 우울과 권태에 정면으로 맞서 글을 써 내려갔고, 사랑으로 구두점을 찍은 것이다.
물론 서투르지만, 나는 써 내려갔고, 그 글을 마치며 나는 변했다고 말하고 싶다.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다. 글을 마치지만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밤이 멎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