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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여섯 번째, 오래된 것

by Taylor

지금은 새벽 12시이다. 잠 못 이루는. 벌써 이 글도 것도 여섯 번째 이야기에 돌입했다. 서투르고 어설픈 글들이었음에도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 말은 즉 나는 서투름에 포기하지 않은 셈이다. 물론 너무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더랬다. 이 짧고 지루한 글을 적어나가는 데에도 많은 결심들과 후회들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이곳에 있다. 여섯 번째 이야기에 갇혀 글을 쓰고 있다.

물론 이 글의 제목을 잠 못 이루는으로 설정했기에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이 글을 작성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가끔은 일찍 쓰고 일찍 끝마쳐버리려고 할 때가 있다. 지겨운 것이다. 처음으로 내게 다가왔던 매력적인 글이 발산하는 빛이 바랜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멈추곤 했다. 새롭게 반짝거리는 것을 찾으려 정처 없이 떠돌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무슨 소용인가. 영원히 반짝이는 것은 없기에 또다시 빛이 바래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실은 중간도 오지 못했지만 지겨워져 버린 이가 있다면 꼭 말하고픈 이야기가 있다. 모든 길고 지루한 일은 시작과 끝만 반짝인다. 한번 아주 짧게 반짝이면 더 이상 빛이 나지 않을 것처럼 군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빛을 볼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굳게 믿으라 조언하고 싶다.

그 오래된 것이 빛이 날 기회가 분명히 있다고 말이다.

실은 오래된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중고제품이라던지 헌책이라던지 하는 것들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때로는 끔찍하게 다가온다. 남이 그 제품에 무슨 짓을 했을 줄 알고! 나는 그렇게 호통치고 싶은 마음 아주 가끔 들곤 한다고 조용히 고백하고 싶다. 때론 사람들을 너무 믿어선 안 된다. 이 세상에서 믿어도 될 사람이 있다는 것은 먹어도 된다고들 하는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과 같은 것이다. 죽지 않을 수도 있지만 굳이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부로 오래된 것들을 사지는 않는다. 의도치 않은 경우는 바로 돈 문제가 있을 때이다. 주머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을 때 우리는 오래된 것에 눈을 돌리기 십상이다. 탈이 나지 않기를 내심 바라면서 그나마 나은 것들을 고른다. 물론 나도 그렇다.

오래된 것이라는 주제를 단지 헌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선 안 된다. 오래된 영화는 어떤가. 화질도 그리 좋지 않고, 오래된 배우들의 웅성거리는 듯한 사운드는 어떤가. 물론 이렇게 말했다간 몰매를 맞을 것을 알기에 나는 감히 욕하지 않겠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오래된 것들이 너무 지겨워져 버릴 때가 있다. 낡고 너덜너덜해진 것들. 그런 것들에게 느낄 매력이 내게 그다지 많지는 않다.

이미 너무 유명해, 다들 고전이라고 입모아 칭찬하지, 그런데 난 지금 당장 극장에 가서 유명한 배우가 나오는 최신작을 보고 끔찍한 비평가가 될래.

그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 새로운 제품, 새로운 것들에 눈을 돌린다. 끊임없이 쏟아져내려오는 그 새로움의 자극에 우리는 빠지는 것이다. 왈칵왈칵 부어지는 시원한 탄산수를 목 따가운 줄 모르고 들이키는 것이다. 마치 덥고 습한 여름날 속을 줄곧 걸어왔던 것처럼. 다시는 그 여름날들을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나는 내게 묻는다. 새로운 것은 언제까지나 새로운가? 사람은 살아가고, 살아가며 나이를 먹는다. 제품들은 곧 중고가 될 것이다. 전 사용자가 어떻게 사용했을지 모른다고 찝찝해하는 동시에 우리는 그 제품을 팔려고 드는 것이다. 네고 해드릴게요, 안 사시겠어요?

새로운 영화는 어떠한가. 한때 극장가를 주름잡던 작품들은 곧 내려갈 것이고, OTT에 올라와 그저 그런 영화들 사이 그저 그런 카테고리에 묶여 그저 그런 금액에 즐길 수 있도록 변해버릴 것이다.

나는 내게 묻는다. 새로운 것이 언제나 즐거운가? 물론 즐겁기도 하다. 그러나 때론 지쳐버린다. 수많은 것들이 서로서로를 따라 하려고 하고 그 잠깐의 자극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는 새로운 것들을 의미 없이 지나쳐가는 것이다. 아무리 어제 나왔다고 한들, 그것들이 새로운가? 나는 수차례, 아주 조금씩 바뀐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렇게 지독하게 질리고 나면 우리는 정처 없이 떠돌다 다시 그 오래되고 지루한 것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지루해하던 그 오만한 자신을 우리는 새까맣게 잊고 그 오래된 것들에 취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오래된 것들은 결국 고유한 것들이다. 새로운 것들이 끊임없이 밀어내려고 한들 결코 밀리지 않는 강한 힘을 지닌 것들이다. 나는 이 상상이 무척 재밌다고 생각한다.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롭다는 어느 유명한 이의 말처럼.

글을 쓰는 일처럼 지루하고 오래 걸리는 일들은 어떠한가. 분명 어제 시작한 글이 오래된 것이 되어 있다. 곰팡이가 슬고 거미줄로 덮인, 더 이상 열어보기 싫은 지하실의 문이 생긴다. 나는 일부러 그 문을 쳐다보지 않는다. 더 예쁘고 알록달록한 문을 열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일이냐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렵다면, 과연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냐는 것이다. 끊임없이 새롭다고 하지만 결국 그것들이 색깔만 다르게 칠한 같은 문이라면, 나는 그 의미 없는 행동을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이냐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기 전 서 있는 오래된 문을 열어야만 한다. 그 안의 것이 얼마나 낡고 어설프고 매력이 없지는 너무나 잘 알지만, 그럼에도 그 오래된 것이 고유한 것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 먼지로 뒤덮인 문고리를 잡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 속에 항상 쓰다 만 글 같은 것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기억이 있다. 누군가를 끔찍하게 싫어하던 나, 바보 같이 이것저것 흘리던 나, 결국 끝끝내 후회하게 만드는 나. 그 오래된 나가 있다.

내가 오래된 것들에 대해서 쓰자고 했을 때, 난 오래된 책과 영화들을 생각했었더랬다. 그렇게 하나 둘 생각들을 정리하다 분명 새것이지만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도 써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글은 아주 미묘하게 흘러갔다. 어딘가 아주 중요한 데를 놓친 것처럼. 그리고 놓친 곳에서 오래된 생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성급히 찾지 않았기에, 나는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결국은 깨달았다. 나는 그 오래된 것을 결코 놓지 못하리란 것을, 그 기억은 알았던 것이다. 굳이 조급해할 것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래된 생각은 나를 괴롭힌다. 죽도록 나를 싫어하게 만든다. 나는 그 끔찍한 기억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어쩌면 나 스스로를 그곳 안에 가둔다. 그야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법이니까.

시간이 과연 흐를까? 흐른다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를까? 어쩌면 우리가 흐르는 것은 아닐까? 어떤 이는 빠르고 날렵하게 흐르고, 어떤 이는 고요하고 잠잠하게 나아가고, 어떤 이는 가만히 멈춘다면.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롭다는 격언에서 가장이라는 단어를 뺀다면, 이 멋진 말은 어쩌면 우리가 흐른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과거에서 조용히, 여전히 새로운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흐른다고 믿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느라, 열심히 흐르는 체하지만 결국 굳은 체로 가장 끔찍한 비명을 꾹 참고 있다면.

나는 얼마만큼 흐를까, 얼마나 빠르게 흐를까, 하고 묻는다고 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한다고 답하고 싶다. 비명은커녕 목이 메어 말을 못 하는 척하면서 살아간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글을 적는 이 밤시간 동안에 나는 비로소 흐르지 않아도 됨을 느끼곤 한다. 딱딱하게 굳은 고체가 되어, 너무나 많이 흘러버렸어, 하고 생각한다. 다시 주섬주섬 그 오래된 것들을 꺼내어본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본디 액체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고체인 체해본다고 한들, 우리는 결국 채우려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딱딱한 척하지도 말고, 질펀하게라도 흘러보자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이 있다. 아주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낡은 물건들이 있고, 너무나 지겨워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도 있고, 흐르지 못해 가장 새롭게 낡아버린 것도 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오래된 것이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것들을 다 밀어낼 만큼 우직하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 오래된 것들의 문을 열었기에 되려 나아간다. 오래된 나는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비록 더 낫지 않아도 된다. 더 퇴화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안심해도 된다. 그리고 다시 오래된 글을 써내려 간다. 다시 반짝이기 위해서. 그렇게 믿어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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