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어색함
지금은 새벽 12시이다. 힘든 하루의 끝에 서서도 나는 여전히 잠에 들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누군가 그 하루가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물어봐줄까. 나는 이 글을 시작한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을 이제야 꺼낸다는 사실에 자책감을 느낀다. 나는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냈는가. 그러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 자신이 육체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남기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글을 쓰기 위해 기꺼이 감수해 본다. 내가 나 자신을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져도 꿋꿋하게 작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그 어색함을 견뎌내어 본다.
어색함이라는 단어 자체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어딘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그 어색함이라는 부정교합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실은 싫어한다. 그러나 나는 살아오며 줄곧 어색하지 않은 체하려고 했다. 끝없이 말을 걸고, 장난을 치고, 웃음을 쥐어 짜내며 어색함을 마치 느끼지 않는 것처럼 우스운 짓거리를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색함은 내가 인간이라는 존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한 나를 끝없이 괴롭히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물론 나도 인간이긴 하지만,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어색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분명 심각한 사안이기에. 물론 그런 적은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싶었던 것이다. 쿨하고 싶었던 것이다. 쿨하다, 물론 친구들과 대화할 때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실은 이 글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멋진 말을 나는 알지도 못하고, 분명 이 단어만이 가지는 그 특별함 탓에 나는 구태여 이 단어를 언급하고 싶다. 나는 쿨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이들이 쿨해지고 싶을 것이다.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그러나 또 그것이 마음만큼 쉬운 일은 아니기에, 우리는 때론 어색한에 지배당해 얼굴 근육을 일 그러 뜨리고 끔찍한 낱말의 조합을 열심히 고안해 내다가 그 어색함이 가실 때 깊은 날숨을 내쉬고는 한다. 나는 그 어색한 순간을 유난히 싫어한다. 마치 그 순간이 지속되었다가는 날숨을 뱉지 못해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다. 더 애석한 점은 실제로는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어색함에 갇히고 만다.
불편한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를 꼬집어 나는 이 어색함에 대해 풀어나가고 싶다.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할까? 이 단어는 우리 사이에 너무나 편한 건 아닐까? 내가 이 사람과 친하다고 착각했다가 뒤에서 말이라도 나오면? 모두 자신은 험담을 하는 동시에 남들이 험담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하는 법이다.
그렇게 어색함에 빠질 때 나는 늘 속으로 바란다. 좀 어색하게 대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그렇게 속으로 상대에게 말을 건네보지만 들을 리는 없다. 그야 입 밖으로 내뱉을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가 나는 되려 내게 묻는다. 네가 먼저 어색하지 않게 대하면 되잖아?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다면 나는 이 글을 쓰고 있을 이유가 없다. 영원한 딜레마에 빠지고야 만다.
그러나 어색한 대화에만 초점을 맞출 이유는 없다. 나는 오늘 매우 독특하고 어색한 경험을 했더랬다. 때는 수학 시간이었고 머리칼이 짧은 수학 선생님은 늘 그렇듯 길고, 지루하고, 괴팍한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동시에 이런 말을 했다. "영상 하나를 봤는데 거기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공부하지 않으면 폭력과 죽음뿐이다, 그렇게 말하더라."
나는 힘써서 그 영상을 찾을 생각도 없고 또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다 떠나가서 그 말이 실제로 누군가에 의해 내뱉어진 것이 맞는지 찾을 생각이 전혀 없다. 단지 그 말이 나의 뇌리에 박힌 것이다. 그 말이 수학 선생님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나서 그 누구도 웃거나 울거나 찡그리거나 질문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저 아무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25명의 학생과 그 앞에서 장황한 연설을 늘어뜨리고 있던 그 선생 사이에는 고요한 어색함이 흘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은 진작에 망했어야 한다고. 분명 앎은 중요하고 따라서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무모한 짓이지만, 그 시간은 수학 시간이었다. 그 말을 수학시간에 비유함으로써 그녀는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수학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죽음과 폭력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하나요?
인생은 필연적인 어색함으로 가득 찬 것이고 우리는 피할 수 없기에 때로는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지만, 분명 어색함이라는 느낌, 혹은 분위기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어색함을 이겨내기 위한 또 다른 어색함은 오히려 그 분위기의 불편함을 극대화하고 우리는 그 끝없는 미로 속에 빠져버린다. 로버트 엘리엇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멋진 말을 통해 우리를 곤경에 몰아넣은 인물. 과연 그는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곤경을 똑같이 느꼈던 진짜 인간이었을까? 나는 의심스러워진다.
그러나 나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노련한 시인들처럼 많이 만들 수는 없기에, 한 시인의 말을 빌리고 싶다. '우리는 안 괜찮으면서 괜찮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 척합니다. 누구든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겠지만 당신만은, 방에서 나와 더 절망하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하지 못한 안부를 전합니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병률 시인의 바다는 잘 있습니다 라는 시집의 뒷면에 적힌 글귀이다. 이 시집을 구매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이유가 되어준 글이다. 분명 나는 글에서 종종 언급했듯 자기연민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가끔은 아무도 위로를 건네주지 않을 때가 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위로하지 않고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거 같은 느낌이 들 때 나는 시집을 꺼내든다. 조용히 시를 읽는다.
어색함이라는 감정은 누군가에게 사소한 것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끔찍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앞서 언급했듯이 어색함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만든 세상 속 다른 인간들과 섞여서 사는 한 명의 인간라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앞에 붙은 전제 조건 '다른 인간들과 섞여서 사는'에 주목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 이들과 끝끝내 섞이지 않기 위해, 조용히 방문을 잠가버리는 이들이 있다. 물론 그중 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또한 말할 수 없다. 대신 시집을 꺼내 들었고, 그때 저 시집이 내게 말을 건 것이다. 방에서 나와 더 절망하기를 바란다던 누군가의 속삭임이 왜 그렇게 애틋했을까. 물론 나는 글귀를 빌린 신세이지만, 진심만은 내 것을 담아 방문을 닫고 있을 누군가에게 이 글 전체를 보내고 싶다. 오늘은 그러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