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9일 토요일
필라델피아 날씨: 아침엔 아주 살짝 선선했음
내 마음의 날씨: 상상초월
그날이 왔다.
드디어.
IUI (Intrauterine Insemination). 즉, 인공 수정하는 날.
아침 7시 45분. 오늘 간 오피스는 내가 평소에 가던 곳이 아닌 좀 더 북쪽에 있는 다른 오피스였다.
블로그에서 보면 한국은 보통 그 장소에서 바로 정자를 채취하는 것 같았는데 여기는 달랐다. 집에서 비커같은 통에 넣어 가져와도 된다고 한다. 그냥 1시간 반 안에만 오피스로 오면 된다고. 병원에서 바로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은데.
한편 폴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는 듯했다. 남자들은 단순하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긴장을 하는 걸까.
...라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니 그도 그럴 것이 당일날 정자 상태가 안 좋으면 인공수정 시술은 다 물 건너가는 것이고, 지금까지 내가 힘들게 진행한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니 일종의 압박감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건가? 그냥 단순하게 컵에다가 사정을 한다는 그 행위가 불편했던 걸까.
물어도 대답해주질 않는다. 진실은 저 너머에.
집에서 정자 채취를 하자마자 바로 차로 30분을 달려가 난임 병원 오피스에 도착했다.
비커를 오피스에 넘기자 45분 뒤에 다시 오라고 한다. 건강한 정자들만 고르는 과정이었다.
배가 고팠던 우리들은 근처 카페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폴은 계속 긴장한 눈치다.
나는 아보카도가 들어있는 샐러드 메뉴를 골랐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착상에 좋은 음식 중 아보카도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함께 빠르게 아침을 먹고 다시 오피스로 돌아갔다.
코로나 때문에 폴은 이번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나를 기다렸다.
시술을 위해 오피스 침대에 눕자 온몸이 긴장되고 떨려온다.
토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의사 선생님 기분도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60대 정도의 의사 선생님, 닥터 프리먼. 평소 나를 보며 항상 웃어주고 어딘가 친근한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내가 너무 긴장을 하니까 신경을 써주셨다.
어?
근데 정말 아무 느낌이 없었다. 시술 시간은 1분 정도 된 듯하다. 아니 아마도 30초? 너무 순식간에 끝나서 '이게 뭐지?' 싶었다.
과정은 간단하다. 엄청 얇은 튜브 주사기를 질 안에 삽입하고 밀어 넣으면 끝.
너무 간단해서 허무할 정도였다.
집에 돌아오니 10시가 약간 넘었다.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서 낮잠을 잤다. 아무것도 아닌 짧은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보다.
1시간 정도 잤나? 별로 깊게 자지도 못했다. 일어나서 착상에 좋다는 음식을 다시 리서치하기 시작한다.
추어탕, 아보카도, 브로콜리, 부추, 두유, 소고기, 석류, 키위, 등등.. 많이도 나온다.
착상에 나쁜 음식으로 냉면과 팥, 아이스크림이 나왔는데 사실 아까부터 너무 아이스크림이 당겼다. 난 스트레스를 받으면 단 음식, 그중 특히 아이스크림이 당긴다.
나에게 주사를 놓아준 산부인과 전문의 친구에게 연락해서 괜찮냐고 물어봤더니 저런 거 믿지 말라고 한다. 그냥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라고. 신뢰할 수 있는 친구의 말에 용기를 얻어 그냥 먹었다.
산부인과에서 특히 산과를 전공하고 많은 수술 경험도 있는 베테랑 전문의. 본인의 아이도 건강하고 예쁘게 낳았다. 그래서 그녀의 말에 더욱 믿음이 많이 간다.
이런 친구를 필라델피아에서 만날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 마음이 따뜻하고 좋은 친구다.
든든한 친구의 조언을 듣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니 기분이 나아진다.
이제 남은 건 9월 11일 금요일, 피검사.
그날 최종 결판이 날것이다.
기특해. 차가운 침대 위에 나 자신.
<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한마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