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보훈해봄
전 해군 제1함대사령부 사령관 천정수 제독이 동해문화원 국가보훈부 보훈해봄 사업 참여를 위해 권세춘 중사에게 편지 한통을 보내왔다. 이 한 통의 편지는, 동해시 발한동 야산에 잠들어 있던 역사의 한 장을 우리 앞에 생생히 펼쳐 보인다. 편지는 후배 전우가 선배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한 개인의 헌신이 어떻게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는가를 증언하는 묵직한 사료와 같다.
편지가 소환한 ‘일심(一心) 학교’의 이야기는 놀랍고도 감동적이다. 1967년부터 1986년까지 해군 묵호경비부(제1함대사령부의 전신)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해 운영, 총 85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비인가 중·고등학교. 사령관이 교장을, 군종목사가 교감을, 해군 장병들이 교사를 맡았던 이 특별한 학교는 그 자체로 민군 상생의 귀한 모델이다. 그러나 천 제독의 편지는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비밀’과 ‘감동의 스토리’가 바로 권세춘 중사에게 있었음을 분명히 한다.
학교의 공식 설립은 1967년이지만, 그 씨앗은 이미 3년 전인 1964년, 권세춘이라는 한 해군 중사에 의해 뿌려졌다.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궁핍의 시절, 박봉으로 자신을 건사하기도 어려웠을 그가 배움의 기회를 놓친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을 열었던 것이다. 천 제독의 “모든 것이 풍요로운 지금도 남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라는 담담한 문장은, 시대를 초월하여 권 중사의 결단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역설한다.
‘일심(一心)’, 즉 ‘하나의 마음’. 학교의 이름 그것은 권 중사의 첫 마음이었고, 그의 뜻을 이어받아 과로로 순직한 故 김수남 군종목사의 희생이었으며, “피와 땀으로 얼룩진 일심을 건설하시다 숨져가신 스승”의 넋을 기리고자 추모비를 세웠던 제자들의 애끓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러 잊힐 뻔한 추모비를 다시 찾아내고 표지석을 세우며 그 정신을 계승하려는 천 제독과 졸업생들의 간절한 마음이기도 했다. 결국 일심학교는 한 사람의 선의가 공동체의 헌신으로 확장되고, 세대를 넘어 기억되고 계승되는 역사의 구체적 증거인 셈이다.
천 제독은 편지의 말미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일심학교를 마주 대하며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은 이제 편지를 읽는 우리 모두의 몫이 되었다. 일심학교의 이야기는 더 이상 발한동 언덕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는 역사가 되었다.
한 사람의 헌신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음을, 진정한 공동체는 ‘하나의 마음’으로 서로의 빛이 되어줄 때 탄생함을 일깨워준 권세춘 중사와 이름 모를 수많은 장병 교사들. 그리고 그 고귀한 역사를 현재로 소환해 준 천정수 제독의 편지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뿌린 ‘사랑의 씨앗’을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떻게 틔워낼 것인지 답해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