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만학일기
지역문화라는 말은 언제부턴가 긍정의 수사로 가득 찬 단어가 되었다. 전통과 예술, 생활 속 풍경까지 ‘지역다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며 도시의 슬로건과 관광포스터를 장식한다.
15일 온라인 줌 야학으로 진행된 이선철 겸임교수(경희사이버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의 공개 특강은 이러한 빛깔 뒤에 가려진 ‘현실의 그림자’를 가차 없이 드러냈다.
교수는 “축제란 지역에서 곧 정치”라고 잘라 말했다. 물론 문화생태계가 건강한 마을은 해당되지 않는 강의며 주장임을 밝혀둔다. 하지만 대부분 축제의 주제와 장소, 하물며 임직원 인선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정치적 협상, 문화권력 등 건널 수 없는 강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지역문화, 정답이 없다. 최소한의 기회일 뿐이다.
교수는 직접 경험한 한 광역 정치인의 예를 들며 지역문화란 결국 ‘순수한 예술’ 보다 어쩌면 정무적 감각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실제로 지역에서 활동 경험을 예로 들며, 문화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행정과 주민, 정치적 이해관계의 균형을 읽어내는 능력이 필수적임을 지적했다.
문화인가, 관광인가
오늘날 지역문화는 문화정책만의 과제가 아니다. 문화재단이 관광재단으로 흡수되고, 문화예술 기획자가 관광위원회에 불려 가는 일이 일상화됐다. “문화는 돈을 쓰는 일, 관광은 돈을 버는 일”이라는 행정적 구분 속에서 문화는 점차 변방으로 밀리고 있다. 천억 원 규모의 관광거점도시 사업이 대표적 사례다. 정책적 명분은 크지만, 지역이 감당하기에는 과도한 규모와 부담이 리스크로 남는다.
지역마다 내세우는 브랜드와 슬로건은 창의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절충의 산물이다. 여러 가지 주장이 홍보 포스터에 동시 등장되는 웃지 못할 사례는 지역브랜딩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해관계자들의 요구가 뒤섞이며 창의성은 희석되고, 결국 “두루두루 민원 안 들어올 만큼의 결과물”만이 남는다.
‘문화도시’, ‘청년마을’, ‘로컬브랜딩’ 등 정부 주도 사업들도 비슷한 딜레마를 안고 있다. 대규모 예산 투입으로 눈에 보이는 실적은 남기지만, 주민 삶의 질 향상이라는 성과는 입증하기 어렵다. 문화도시 사업에서 쏟아낸 수십억 원이 축제와 공간 확충으로 이어지지만, 그것이 지역의 문화적 자부심과 지속성을 키웠는지에 대해서는 회의가 남는다.
교수는 리스크를 “위험(danger)과는 다른, 대비할 수 있는 확률”이라 정의했다. 야외 행사의 돌발적 비와 같이 예측 가능한 변수, 그리고 행정과 시장, 주민 이해관계 사이에서 벌어질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지역문화는 환상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리스크를 인식하고 관리하는 능력이야말로 지역문화의 생존 조건이라는 그의 주장은 현장의 무게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지역문화는 아름다운 꿈과 냉혹한 현실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환상만 좇는다면 쉽게 좌절하고, 현실만 직시한다면 이상을 잃는다. 교수의 특강은 바로 그 경계 위에서, 문화기획자와 행정가, 연구자 모두에게 “리스크를 직시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지역문화를 소멸이 아닌 새로운 지속성으로 이끄는 최소한의 조건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