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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Apr 15. 2023

봉황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국, 봉정마을

20.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봉정마을

봉정鳳亭이란 지명은 지형이 봉황형국鳳凰形局이라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두타산으로부터 내려온 마을의 산세가 봉황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국이라 했다. 나무가 울창한 숲이 마치 정자처럼 보여 '정亭'자를 붙여 이름을 지었다. 산 아래 첫 동네는 오래전부터 각종 옹기를 만들어 팔았다 하여 '옹기정甕器亭'이라 불렀다. 그 옆 상촌에는 전주최 씨가 봉황의 등에 해당되는 언덕에 살았다 하여 '봉구정鳳邱亭'이라 이름 붙였다. 그 후 하촌에 강릉김 씨가 터를 잡았고, 봉황의 꼬리 부분이라 하여 '봉미정鳳尾亭'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세 동네를 합쳐 봉정이라 했고, 다시 옆 동네인 '단 실'과 합쳐 '단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봉정'은 이렇듯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듯이, 길 또한 여러 갈래가 있었다. 묵호와 삼척을 잇는 산업도로가 '7번 국도'로 바뀌었는데, 이로 인해 봉정이 양분되고 말았다. 또, 도계로 가는 '38번 국도'가 단실과 봉정, 1리와 3리를 가르며 지났다. 이 과정에서 좁은 농로와 국도가 얽혀 동네 경계 구분이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봉정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사람도 알쏭달쏭한 사안을 접하면 '지상인지 봉정인지 도통 모르겠네!'라 고개를 저었다. 또, 단봉은 예부터 관로가 있었는데, 신작로 개설 이후에도 장꾼들이 주로 다녔다. 북평장터가 월동에서 북평 1일로 옮겨오자 장꾼들은 짐을 머리에 이거나 지고 구장터, 단 실, 중촌, 구미실, 호현, 대구리, 우지리, 마달리 성내리로 오갔다.


단봉은 도로 외에 철길도 났는데, 묵호~도계를 잇는 철로가 일제강점기 때 생겼다. 또, 송정~삼척을 있는 '삼척선' 철로가 봉정 하촌마을을 지나자. 전통적인 유교마을도 서서히 변화의 길을 걷게 됐다.

봉정출신 김영남(여, 70)씨가 철로와 얽힌 추억을 들려주었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있는 철로 밑의 터널로 사람들과 차들이 다니지만, 예전은 위로 다녔어요. 철로는 봉정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을 했어요. 정월보름날은 망우리를 돌렸지요. 무논과 연당이 있어 민물고기를 수시로 잡았고, 가을이 되면 '최상규 과수원'으로 몰래 들어가 서리를 해서 철로에서 먹곤 했지요. 겨울은 무논마다 얼름이 얼어 거대한 스케이트장이 되었어요. 높은 송곳침으로 얼음을 찍어 '시게토'를 탔는데 지치면 철둑길로 올라와 쉬었어요.


가을은 엽총을 가진 선배들이 무논에 앉은 기러기를 쏘면 건져주고 용돈을 벌었어요. 철길에서 마을을 바라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며, 언덕의 집들이 한 폭의 그림 같았지요. 철길이 우리 봉정으로 나서인지 이상하게 철도에 다니는 분들이 많았어요. 이분들 중에 기관사를 하신 분들이 많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요즈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을 60년대는 다들 눈감아주었어요. 외갓집이 미로 상정에 있었는데 외삼촌이 어느 날 찾아와, 관 짜는 늘(널) 4판을 만들어 놨다는 겁니다. 당시만 해도 삼베로 만든 수의와 시신이 들어갈 늘을 준비하는 개 시골의 제일 중요한 일이었어요. 외삼촌은 '늘'을 상정역에서 기차에 실어줄 테니, 내리는 건 너희가 해라'고 했어요. 역까지 가면 너무 멀어, 무겁고 큰 늘을 운반할 방법이 없었는데 단실에 내려주어 집으로 쉽게 가져왔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귀한 늘을 사용하고, 남은 나무는 창틀과 문살을 만들었어요. 또, 우리 마을에 잔치집이 있으면 기관사들은 연당 앞에서 천천히 지나며 귀한 콜탄이 든 자루를 던져주었어요. 그러면 그 탄으로 지짐이며 떡이며 만들 때 요긴하게 썼어요.


철길이 생겨 마을에 도움도 주었지만 강릉김 씨 종가인 '진사집'이 헐릴 뻔했던 위기도 있었어요. 300년 전에 유명한 지관이 진사집 지형을 보더니, 까치가 나뭇가지에 보금자리를 트는 형국(옥작 소지형)의 명당인데, 집 앞으로 쇠말이 지나면 옮겨야 할 형국이라 했다는 거예요. 과연 '동해항' 증설공사를 하며 원활한 화물 수송을 위해 조차장 시설을 갖춘 간이역을 조성하기 위해 '진사집' 일대의 땅을 매수했어요. 한창 토목공사를 했는데, 어느 날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중단이 되었어요. 지관의 예언이 맞을 뻔했지만 조상들이 돌보았는지, 고택이며 연당이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진사집'은 오래전부터 유림의 대표적인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학문을 연마하고 연당에서 풍류를 즐겼다. 선조 중에 대표적인 분이 호암 김종의(1766~1841)인데,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예의범절이 남달랐다. 또, 서책을 좋아해 꾸준히 모으고 필사해 농막에 두었다가 후손을 위해 누각을 지어 '예헌'이라 쓴 액을 달았다. 또, 집 앞 무논에 연을 심고 물고기를 길렀다. 중앙에 섬을 만들어 정자를 짓고(1819) '휘정'이란 현판을 달아 호연의 뜻을 세웠다.

친구인 창에 최종원은 '휘정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김진사집, 사진_동해문화원 DB

"(중략)'휘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을 지었는데, 휘는 봉황을 뜻하는 것이었다. 김 공은 그 이름이 적당하지 않다고 말하기에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봉황이 이 정자에 살고 있는 것을 나는 볼 수 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보지 못하는가? 형체로써 봉항을 보려들지 말고 오직 깨달음으로써 보아야 한다. 봉황은 천지의 화기를 잉태하고 원기를 쌓아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곧 사람의 덕이 위로 하늘에 닿아야 상서로운 기가 생기고 또한 하늘의 큰 복을 받아야 봉황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집안은 대대로 덕을 쌀고 자손들이 그 덕을 이어 받아 하늘에서 돕는 것이다. 내가 봉황을 보았다는 것은 이러한 이치를 뜻하는 것이다."

고택에 살고 있는 후손 김창남(남, 83)씨가 쓴 '예촌일기' 후기에 '애艾'자에 대한 궁금증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애艾의 첫 번째 음은 쑥"애'이다. 약초로도 쓰이는 쑥을 말한다. 두 번째 음은 다스릴, 본받을 '예'이다. 고사에 의하면 어떤 묘에 쑥이 무수히 돋았다. 주인은 쑥을 베고 또 베고를 계속하니, 지나는 사람마다 '그것 참, 본받을 만하다'라고 모두들 칭송했다. 쑥은 약초로도 쓰이지만 가만히 두면 한없이 자란다. 그래서 묘에 쑥이 무성하면 쑥밭이 되었다고 흉을 본다. 그러나 자부 베고 베면 모양새 좋은 묘가 된다. 해서 본받을 '예艾'가 된 것이다."

오랫동안 봉정의 통장을 맡아 도로로 인해 갈라진 민심을 화합하고, 떠났던 젊은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앞장 서온 최지열(남, 83)씨가 그동안 봉정마을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봉정은 읍내 장터와 가깝고 무엇보다 전기가 빨리 들어온 마을이죠. 5.16 혁명 후 한국은행과 자매결연하여 다른 마을 보다 4년 먼저 밝은 밤을 맞이했지요. 마을회관도 이때 지어 당시로서 성대하게 준공식을 거행했지요. 그러다 보니 동네일도 합심일체가 되어 타의 모범이 될 정도가 되었어요. 그러나 그 후, 동서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에 도로 와 철로가 들어서자, 주민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어요. 겨우 정월초하루의 고청제와 도배 때만 얼굴을 보고, 무엇보다 젊은이 가 없는 마을로 되나 보니 아이 울음소리가 없는 노인들의 동네가 되었어요.


그러다 최종석 선생을 시작으로 귀향하는 사람이 하나 둘 생겼어요. 마침 시 주관의 공모사업에 참여하게 되어, 2006년 장수마을 사업에 선정되어 소공원을 먼저 가꾸었어요. 여기서 최 선생의 제의로 주민들이 '봉황춤'을 배우게 되어 각종 대회에서 수상하자, 동네 화합이 절로 되고 살아있는 마을로 변하게 되었어요. 2009년은 '참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에 선정되어 마을 곳곳에 풍년을 기원하고 수호신을 상징하는 솟대를 세우고, 집집마다 대문에 택호를 붙이는 사업을 했어요. 그리고 국토해양부가 주최한 '농촌체험휴양마을'에 '연당과 봉황춤이 있는 돌아오는 마을 만들기'에 선정되어 옛 문헌의 고증을 받아 새로운 '연당'과 '정자'를 만들었어요.

우리 마을의 도배는 정월 초하루 0시부터 시작되었어요. 보름 전에 마을 총회를 열러 헌관과 제집사를 선정했는데, 꼭 젊은이들을 참여시켰어요. 그 이유는 고청제의 전통을 전승시키려는 의도였지요. 선정된 집에서는 왼새끼를 꼬고 그 사이에 한지와 솔가지를 끼우고 황토 덩어리를  곳곳에 놓았는데, 이는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막는다는 의미였어요. 섣달 그믐 오후에는 수탉을 잡아 피를 제단 주위에 뿌려 부정과 잡신의 접근을 막고 새벽 0시에 화덕불을 밝혀 메 세 그릇, 백설기 세 시루, 미나리와 무로 만든 나물, 3실과 대구포, 가자미 9마리, 소고기 3근 등을 진설해 제의를 지냈어요. 제의가 끝나면 제물을 마을 회관에 보관했다가 도배 때 반포했어요. 우리 마을의 정월초하루 제의는 이렇게 면면히 이어져 왔는데, 1993년부터는 앞산 제당에서 신축 마을회관으로 옮겨왔어요. 10시쯤이 되면 각 집에서 설을 쉰 젊은이들이 부친을 모시고 마을회관으로 하나둘 모였어요.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마을 어르신들이 도열해 앉으면 젊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도배都拜'를 했어요."


일제강점기 때 마을 입구 동쪽 높은 곳에 금란정을 지었다가 6.25 후 무릉계로 옮겼다. 강릉 김 씨 진사댁에서 지은 휘정(輝亭)도 이 마을에 보존되고 있다. 예로부터 운치와 풍류가 넘쳐 온 마을에는 지은이를 알 수 없는 봉정 팔경 시 한수가 전해지고 있다.

봉정마을 전기시설 준공기념(1963), 사진_ 동해문화원 DB
봉정 팔경(鳳亭 八景)

① 후원녹죽(後園綠竹): 후원에 늘어선 푸른 대나무들

② 전당홍련(前塘紅蓮): 전당(휘당의 연당)에 피어 있는 홍련의 모습

③ 문현조양(門峴朝陽): 문고개에 떠오르는 아침해의 모습

④ 작자청람(鵲資淸嵐): 까차불에 피어오르는 맑은 아지랑이

⑤ 운곡모침(雲谷暮砧): 운곡 마을에 울려 퍼지는 저녁 다듬이 방망이 소리

⑥ 송산석조(松山夕照): 송산에 걸린 지는 해의 모습

⑦ 홰동초가(噦洞樵歌): 홰동(햇골마을)에 울려 퍼지는 나무꾼들의 노랫소리

⑧ 구호명월(龜湖明月): 구호에 뜬 밝은 달의 모습


새 농어촌 건설운동 추진위원장을 맡아 마을변화를 주도했던 최지열 씨에 의하면 “봉정 마을은 수려한 자연환경과 맑고 깨끗한 하천 넓고 푸른 바다 그리고 넉넉한 인심 등 장점으로 작용, 지역의 미래는 매우 밝을 것”이라고 했다. 최위원장 등은 무릉계곡과 추암 촛대바위 등 관광명소와 인접해 있는 지리적 이점을 십분 발휘, 봉정마을을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는 안식처로 가꿔나가고 있다.

봉정마을 연당, 사진_동해문화원 DB
참고문헌_이야기가 있는 북평,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위치_ 강원 동해시 봉정1길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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