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장거리 연애를 하던 시절,
금요일 일과를 마치고 몇 시간이나 걸리는 기차를 타고
꾸벅꾸벅 졸다가 도착한 늦은 밤의 기차역에는
집에서 거의 한 시간이나 걸리는 버스를 타고 날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
쌀쌀한 그 밤 그의 손을 잡고, 얼마 남지 않은 밤의 시간을 아끼고자 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차가 얼마 없는 산등성이의 뒷길로 도시를 가로지르자,
굽이치는 도로변의 벚꽃들이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가로등 아래에서 환하게 빛났다.
그렇게 택시의 창문으로 머리 위를 수없이 스치는 그 벚꽃을 보던 그 순간이
그를 만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었다.
다시 벚꽃이 피었을 무렵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택시에서 벚꽃을 본 그 날의 기억이 그와 나 모두에게 마지막 벚꽃 나들이의 기억이 되어버렸다.
*
그때 본 벚꽃 장면 사이사이로 기억했던 많은 것들이 하얗게 바랬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알 수 없는 시간으로 변해간다.
가끔 그에 대한 기억이 문득 떠오르면 일부러 그때의 벚꽃 생각을 하곤 한다.
어차피 다 하얘질 기억이라면, 그렇게 꽃잎에 뒤덮여 흩날리며 사라졌으면 싶다.
하얀 기억이 되어 어딘가로 다 떠나보내야 조금은 덜 미안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