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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Mar 30. 2019

무뎌진다는 게

Week 4. 알레르기/류마티스내과 실습


기억의 화로에서 데워진 감정은 언젠가 다시 연기로 흩어지기 마련이다.


망각은 신이 내린 축복이라는 말이 있듯, 사람이면 언젠가는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둔해지게 된다. 심지어 사랑도 그러한데, 좋아하는 일이라고 과연 그렇지 않을까?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재미있어서 그렇다기에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보다는, 그 안의 세상이 놀랍도록 현실과 닮았거나 아니면 환상적일 정도로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라는 게 좀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가족과 떨어져 있어 어쩔 수 없이 하는 자취의 장점 중 하나에는 본인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 있겠다. 혼자 살며 자연스레 '나'를 공부할 시간은 당연한 듯 주어졌으며 생각보다 나는 별 것 아닌 것에 민감하고 훨씬 가녀린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성은 항상 감성의 저 너머에 있었고, 혼자 그 안에서 몇 날 며칠 밤을 헤매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나에게 병원에서 매일 일어나는 현실은 너무 가혹했다.


당장 한 발짝만 밖으로 떼면 눈부신 햇살이 흘러내리고 향기로운 벚꽃 향기가 터져 나오는데, 반대로 안쪽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 투성이었다. 반드시 피가 튀기고, 뼈와 살점이 난무하는 것만이 잔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알레르기 비염의 원인에는 집먼지진드기, 꽃가루, 애완동물, 바퀴벌레, 곰팡이 등 다양한 것들이 있다. 특징적인 양상으로는 재채기 발작, 맑은 콧물, 코 막힘 등이 있으며, 열이 나는 증상 없이 이런 증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거나 자주 일어난다면 의심할 수 있다. 원인 물질을 밝혀내고 난 뒤 회피나 제거가 가능한 것이면 주위 환경에서 없애는 노력이 필요하다. 알레르기 내과에서는 회피나 제거가 어렵고, 약제로 잘 조절이 되지 않는 알레르기 비염에 대해 면역치료요법을 시행한다.


면역치료요법이란,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최대한의 농도로 원인 항원을 지속적, 규칙적으로 투여하여 체내에서 면역반응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서 결국 원인물질에 대한 감수성을 축소시키는 방법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몸을 민감했던 물질에 계속 노출시켜 무뎌지게 하는 것이다. 면역요법은 최소 3년의 치료기간이 필요하다.

 

무뎌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본원 류마티스과에서 한 교수님께 20년가량 진료를 받던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가 다른 과에서 수술을 받다, 수술부위에 감염이 되어 위중한 상태에 빠졌다. 해당 과의 수술은 류마티스 관절염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고, 그 환자를 처음 보게 된 계기도 단순히 교수님의 오래된 환자라는 이유에서였다.


딸은, 이미 눈물은 흘릴 대로 흘렸으며, 마를 대로 말랐다고 했다. 간호사들은 아무도 대변 치우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고 뒤치다꺼리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설사를 몇 번씩 하든, 구토를 몇 번씩이나 해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으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울부짖었다. 그러면서 다시 몇 번을 울먹거리다 어떻게 20년을 다녔는데 00 병원에서 이럴 수 있냐며, 독해지지 않고서는 병원생활을 할 수가 없겠다고 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의사를 보며,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했다.


교수님이 무엇이라 위로를 해 주고, 공감을 해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주위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괜찮았고, 나는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무너지지 않으려 무뎌지는 것인지, 무뎌짐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는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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