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lish Oct 18. 2024

8장. 아버지의 심부름

가을밤 잠 못자고 깻잎김치 담그는 풍경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학교 가기 전 한두 시간 전에 은호를 깨워 눈도 비비지 못한 은호의 등을 떠밀어 심부름을 보낸다. 윗마을 은행 다니는 아제에게 통장과 도장을 갖다 주고 오라 하신다. 얼떨결에 가기는 하지만 매일같이 계속되는 그 심부름이  은호는 괴롭고 무섭고 힘들었다. 왜냐하면 윗동네까지 가는 길의 중간 언덕배기에는 묘똥도 몇 개나 지나야 했고 그 새벽에 지나갈 때는 어스름한 안개까지 끼어 있어서 전설의 고향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아버지는 남동생도 있고 언니도 있는데 은호에게 그런 심부름을 보낸단 말인가. 은호는 이해할 수 없었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선택의 여지가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 아버지가 어릴 때 지어주신 약발이 다 됐구나 느낀 어느 날 문득 은호는 그것이 아버지가 은호의 체력을 키워주려 한 것임을 문득 알게 되었다.


어머니 심부름


맨날 하루도 빠짐없이 흥미로운 놀이에 빠져 친구들과 놀고 있는 은호를 어머니가 가끔 불러서 밭일을 함께 하자시키신다. 깻잎이나 고추를 따거나, 풀을 뽑거나 하는 잡다한 밭일인데  하던 일이 아니라 일머리가 없던 은호에게는 버겁기도 했고 각종 놀이를 섭렵하느라 바쁘고 귀찮기도 해서 달갑지 않게 도와 드리곤 했었다. 이제 커서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나이가 되어 업무와 집안 일로 혹사당하는 날에는 뜬금없이  아무도 어머니의 어깨에 언제나 놓여 있던 짐을 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아버지가 약방일을 하는 동안 밤산과 과수원을 돌보는 일은 온전히 어머니의 몫이 된다.

일꾼들 밥과 새참을 해서 산으로 나르는 일은 놀고 있는 손들을 다 소집해야 하는 일이었고 수확기가 되면 모두가 밤산에 매여서 밤 까고 고르는 일에 손을 보태야 한다. 어린 나이에 시집온 어머니의 음식솜씨는 그 많은 일꾼들을 먹이고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날로 발전하고 손도 커질 수밖에 없다. 밤과 사과 수매가 끝날 때쯤에는 밭에 짬짬이 심어놓은 식구들 먹일 깻잎이며 콩, 팥 등을 거두어들이고 두고두고 먹을 음식을 장만하느라 손에 물이 마를 새가 없다. 일 년에 한 번씩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밤에는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겨우내 먹을 깻잎김치를 담그는데 밤과 당근을 채 썰고 물엿을 넣은 양념에 깻잎을 가지런히 준비하여 양념을 치대는 작업을 한다. 처음에는 여럿이 둘러앉아 경쾌하게 시작하고 갖가지 노래와 놀이도 흥을 돋우지만 점차 시들해지면서 꾸벅꾸벅 졸만큼이나 지루하고 긴 여정이다. 설 전날 모두 앉아 가래떡을 쓰는 것에나 비할 바가 있을 일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