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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3) :국문과인데요, 아직 안 굶어 죽었습니다

AI 시대, why는 사라지지 않는다

by 티백 자판기
자녀가 순수 예술이나 철학을 전공했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직업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고대 그리스 뿐일 테니까요.
해당 전공자들의 행운을 빕니다.
- 코난 오브라이언, 다트머스 대학 졸업 연설 중


나는 국문학을 전공했다. 흔히 말하는 '굶어 죽기 딱 좋은 전공'이었다. 학부 졸업만으로는 진로가 막막해 인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당시만 해도 IT 업계와 나는 전혀 관련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개발자들이 득실대는 IT 업계에서 8년째 일하고 있다.


개발자가 대부분인 이 환경에서 국문과 출신인 내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사고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발자들은 “how”에 집중한다.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구현할지,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what”이나 “why”는 비교적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기획자는 “what”과 “why”를 정의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내가 만나온 일부 기획자들은 “what”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 배경에 있는 “why”는 충분히 따지지 않고 넘어가곤 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조금 달랐다. 늘 “why”를 먼저 고민했고, 그 질문이 설득력 있는 “what”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했다. 기획자는 “what”을 정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뿌리에 있는 “why”를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기획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how”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그래서 기획자와 개발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생겼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AI 시대가 되며 그 경계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자는 보통 “what”을 정의하고, 개발자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왜냐하면 “how”는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AI의 등장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이제는 “why”와 “what”을 제대로 이해하는 기획자들이 AI 덕분에 쉽게 “how”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나 역시 그런 흐름 속에서 여러 시도를 해보고 있다. 글쓰기나 미술 등 내가 익숙한 분야에서 AI를 활용해 작업하며, 기존에 약했던 “how”의 장벽을 얼마나 쉽게 넘어설 수 있는지 직접 시험해보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림 전시를 준비하며 AI를 활용해 구상을 시각화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해 나가는 일은, 그림을 그릴 줄 몰랐던 과거의 나에겐 상상도 못 할 경험이었다. 하지만 AI 툴 덕분에 “how”의 장벽이 낮아지면서,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이미지들이 점차 현실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그런 시도 끝에 도달한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본질적인 공부가 중요하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다면, 먼저 맛있는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기준이 있어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맛의 기준이 분명하면 “how”는 나중 문제다. 그 기준만 제대로 알고 있다면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결국 원하는 결과에 가까워질 수 있다.


반대로 기준 없이 “how”만 파고들면 방향을 잃기 쉽다. 목표가 없는데 어떻게 도달하겠는가. 운 좋게 훌륭한 결과를 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짜 좋은 것인지 스스로 판단할 기준이 없다면 자기도 모르게 길을 잃을 수 있다.


나는 문학을 공부하며 익힌 서사, 은유, 상징에 대한 감각이 지금 AI와 협업할 때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이 되고 있다고 느낀다.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지, 무엇이 더 좋은 결과인지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야말로 인문학, 예술, 철학 같은 '비실용적'이라 불리던 공부들이 다시 주목받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들 학문은 인간의 경험과 감정, 가치와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다룬다. 그리고 그런 통찰이야말로 기술이 대신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다.


기술이 더 발전할수록 우리는 오히려 “how”보다 “what”과 “why”를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 AI가 “how”를 대신하게 될수록, 인간은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변화와 혁신을 이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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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차에서는 새로운 연작의 소개글이 공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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