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우리 안의 적
“꿈 속에 화려하고 멋진 남자가 되어 온갖 영화를 누리길 어언 30년、하지만 인생의 즐거움이 고작 좁쌀 만한 떡 하나 찧는 것과 같구나。”
꿈에서 깬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저버렸던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에도시대 후기 기뵤시 소설(표지가 노란색인 소설을 의미)의 원조 <긴킨 선생 영화몽> 중에서
'거울을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원숭이로 보인다。'
내가 원숭이로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샤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나오는 구절인데、거울을 거의 안 보는 나의 경우 원숭이는 아니어도 처음 괜찮다 하던 마음이 보면 볼수록 흠만 더 보이고 끝내 내 얼굴을 내가 외면하고 만다。'이렇게 생겼더라면?' 더 큰 욕심이 붙기 때문일 것이다。이를 샤르트르는 문학적 표현일듯한 '원숭이'로 비유했다。
이래서 가면을 쓰기 시작했나? 가면은 세계 거의 모든 문화에서 나타난다。수만 년 전 원시부족 때도、지금도 마찬가지다。의술의 발달로 가면 대신 성형이 늘면서 가장 인기 있는 전문의가 성형외과가 되었단다。외국의 경우는 모르겠다。한국은 그렇다。이러니 더 필요하고 필수적인 소아과나 내과、산부인과 전문의의 지원이 거의 없다시피 한다고 한다。유행이 다 그렇듯이 쏠림은 한 쪽으로 치우치게 만들고 이쪽을 붕괴에 이르게 한다。
꿈도 다른 가면이다。바람、소원、소망이 잠 또는 상상해서 나타나는 것이리니 꿈을 소재로 한 글은 오래 전부터 많았다。전설이나 신화、특히 각국의 건국 신화는 다 꿈을 담고 있다。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을 정복 지배하게 하려니 하늘로 상징되는 새와 알이 동원된다。
일본의 고전에는 유난히 꿈과 괴기스러운 소설들이 많이 등장한다。이것이 지금의 일본 만화나 추리소설로 이어져 오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한다。에도시대에 이미 서양의 이솝이야기를 번역해 읽었다니 놀랍다。
범생이던 나는 중학생 때 빨간 책이라는 걸 처음 보았다。책이라고 하기엔 프린트를 조악하게 묶어 놓은 손바닥만한 작은 책인데 겉표지가 빨갰다。그래서 빨간 책이라고 한 듯한데 뒷자리에 키 큰 놈들이 내게 보여주며 읽어보라 하기에 받아 펼치니 첫 구절부터 매우 야해 멈칫하자 내 다리 사이 가운데로 그 중 한 놈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나는 화들짝 놀라 뿌리치며 일어났고 그놈들은 깔깔깔 웃어댔다。빨간책의 기억은 이것이 처음이자 끝이다。
그런데 일본은 3、400년 전에도 빨간 책이 있었나 보다。에도시대에 부를 누리던 신흥세력인 상인(도시상인으로 조닌이라 한다。)들과 서민들을 중심으로 여러 종류의 책들이 유행했다。아카혼(빨간책)、구로혼(검은책)、아오혼(파란책)、기뵤시(노란책)라고 하여 겉표지의 색으로 책의 형태를 달리 불렀다。대체로 저속한 내용으로、그러려니 삽화가 필요했나 보다。이미 그 때부터 만화가 성행했다。소설 속의 그림、일본은 이런 것에서도 빨랐다。이 뿐만이 아니라 보통 책의 4분의 1 크기、즉 네 번 접은 작은 책에 글을 담으려니、아니면 반대로 하이쿠 같은 짧은 시를 담으려니 손바닥만한 책이 필요했을 듯하다。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기에도 좋았을 것이다。이렇게 시나 소설을 여러 종류의 책자로 발전시켰다。
거의 권선징악만 다루고 있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여자는 혼자서 지내는 것이 재미가 없자。。。。。。”
음란한 성생활의 소설들도 많았다。많이 읽혔다는 얘기다。성생활을 묘사하려니 글만으로는 부족해 그림이 보태졌을 것이고 소설 속 삽화를 대량으로 찍어내려니 목판화가 발전했을 것이다。
16세기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인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우키요에(우키요=덧없는 세상、에=그림)가 바로 그것이다。원래 도자기의 포장지로 유럽에 건너간 우키요에를 고흐 등 주로 인상파 서양화가들이 보고 흉내내는 사조까지 생겨났다。자포니즘이라고 한다。
목판인쇄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했고 금속인쇄 역시 한국이 세계 최초다。그런데 우리는 그 좋은 것을 발명해 놓고도 왜 발전시키지 못한 것일까。또 <절대지식 일본고전>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인쇄술의 발전>
근세 문학사에서 특기할 사항은 이제까지 직접 붓으로 써서 전해졌던 문학이 인쇄술의 발전으로 독자수를 급속히 늘려갔다는 점이다。따라서 일본의 인쇄술이 전래된 1592년을 근세의 시작으로 삼는 것은 아시카가 막부가 붕괴된 1573년이나 에도막부 가 막을 연 1603년을 기점으로 삼는 것보다 더 의미가 깊다。근세는 인쇄술이 도입된 이 때를 기점으로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약 290년을 가리킨다。
일본지식인들이 쓴 책이다。1592년을 근세의 시작으로 삼고 그 기회는 인쇄술의 전래에서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어디서、어떻게'는 빼고 있다。일본인은 왜 이럴까? 1592년은 임진왜란으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고 그 때 상당한 신문물을 빼앗아 갔다。그 중 하나가 인쇄술이라는 걸 나는 한국 역사서가 아닌 일본인들이 쓴 책에서 처음 보았다。한국역사서에는 당시 주로 도자기만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기록 외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훔쳐 간 팔만대장경 인쇄본을 일본은 자신의 유산이라며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시키려고 하고 있다。
일본지식인이 쓴 그대로 일본 근세시대를 연 인쇄술、그것은 한국(조선)에서 가져갔다는 엄연한 사실을 알면서도 왜 숨기는 걸까。그러려면 1592년이란 구체적인 시대를 명시하지 말든가。바로 들통날 일을 버젓이 해대는 이런 뻔뻔함은 이것뿐만이 아니다。일본 국보의 상당수가 백제나 신라에서 넘어간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백제나 신라 빼고 중국에서 넘어왔다고 교과서나 교재에 쓰고 있다。
어설픈 가면으로 속이려 든다는 생각이 가소롭지만 세계는 이에 다 속고 있다。일본 중앙정부나 유수 출판사에선 숨기거나 왜곡하고 있는 일본 내 한국의 잔재들은 일본의 지방 곳곳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다。유물만이 아니라 마츠리(축제) 에서도 마찬가지이다。지방까진 그 유래나 전례를 아직 다 소각시키지 못해서인가。아님 일본 지방만은 아직 양심이 남아서인가。그러나 남탓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한국은 그 뛰어난 것들을 발명하고도 발전시키지 못하고 중국 사대의 그늘에 스스로 묶였다고 한다면、일본은 외국(주로 한국) 문화나 문명을 받아들여 일본화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동시에 이 사실을 숨기는 데에도 뛰어나고 급급하다。
한국과 비교하려니 문득、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불살라져 상당수가 소실됐다는 그 소실 이유가 불쑥 내 머리에서 튀어나온다。이 지도가 외국(특히 일본)에 전해지면 한국의 지형을 적국에 알려 침략에 이용될 수 있다고 해서 이를 막는다고 목판에 하나하나 새겨 제작된 <대동여지도>는 상당수가 불태워졌다고 한다。또 조선시대의 길이 좁은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다。길을 넓혀 놓으면 일본이 더 빠르게 한국 땅을 침략할 수 있기에 이를 막으려니 길을 좁게。。。。。。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한심하다。과거 얘기가 아니다。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대동여지도> 대신 네이버의 <라인> 그리고 독도、그리고 제주도 아래 제7광구 대륙봉 。。。
일본 정치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기 전에 여전히 치졸하고 졸렬하고 한심한 한국 권력자들의 행태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우리의 행태를 우리 스스로 정의하지 못하면 또 외세 침략은 일어날 것이고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리 안의 다른 우리、우리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우리 안의 적이 우리를 압살할 것이 분명하다。청산하지 못했고 척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이승만、박정희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사라졌겠지 싶었지만 오히려 더 치졸하기 그지 없는 권력자에게、그리고 그 추종자들에게 과거청산이나 적폐척결을 또 외쳐야 된다는 사실에。。。'다시 이제라도。。。' 우리는 언제나 과거로만 회귀하고 살아야만 하나。우리 민족에게 미래는 없는 것인가。
김구 선생님의 말은 70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옳다。70년이 지나서도 김구 선생님의 이 말을 또 되새겨야 한다는 건 한국의 치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릴 침략하는 남보다 더 사악한 무리는 그 침략자에 빌붙어 부역하는 우리 안의 적들이다。내게 한 발의 총알이 든 총이 있다면 우리 안의 그 적에게 그 한 방을 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