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전략전술의 명인들은 거의 다 비겁자다。여태까지 믿고 있던 상식을 깨뜨려버림으로써 상대 입장에서 보면 비겁하기 짝이 없다。그러나 상식을 깼다는 사실 안에 독창성이 깃들어 있다。오다 노부나가는 한두 번 실패에도 절대 굴하지 않고 결국 상대방을 무릎 꿇게 했다。처음부터 실패와 비난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가 고민해 낸 것이 '라쿠이치 라쿠자(락시락좌/후에 한자로)'이다。라쿠이치 라쿠자란、일본 전국시대에 다이묘가 상인들을 자신의 지역으로 끌어모으기 위해서 시장이나 주요 도시에서 행해오던 독점적인 시장특권을 버리고 신규상인에게도 자유로운 영업을 허가한 새로운 법령이다。안전하고도 두둑한 관세가 들어오지 않으니 노부나가의 수입은 줄어들 텐데도 불구하고 기존의 독점을 폐지했다。이는 지금의 규제 완화와 같은 것으로 당연히 다이묘에 빌붙어 재산을 불리던 기성 상인들은 모두 반대했지만、나중에는 더 거대한 경제력으로 이끌어 더 많은 이들이 혜택을 보는 쪽으로 발전했다。
---사카이야 다이치가 쓴 <일본을 이끌어 온 12 인물> 중에서
심복에게 죽임을 당한 오다 노부나가、이후 그 심복을 처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의 원을 풀어 주고 세상을 다 차지하는 듯 했으나 오다의 또 다른 부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히데요시의 아들과 부인이 처참히 죽어야 했다는 남의 나라 이야기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과 관련 있어 알게 된 일본의 장수 3명。이들 세 명의 삶은 일본인들이 가장 즐기는 역사요 소설이요 드라마라고 한다。이 세 명으로 인간의 새 유형으로까지 비화시켜 화제로 삼고 있다。출세나 성공에 관한 이야기일진데。。。
“울지 않는 두견새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해답을 들어보자。노부나가는、“당장 죽여라!” 히데요시는、“울도록 만들어라!” 그럼 이에야스는、“울 때까지 기다려라!”
동지였던 장수들끼리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하극상을 보면 두견새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세 명의 대답은 드라마틱하게 미화됐을 뿐이다。여기선 노부나가의 '라쿠이치 라쿠자'라는 당시 새 법령에 주목해 본다。이 책 <일본을 이끌어온 12 인물>의 저자는 일본 역사의 위대한 인물 12명을 꼽으며 과거를 통해 현재 일본이 바뀌어야 하는 새 지향을 말하고자 한 듯하다。그러자니 잘한 것과 아쉬운 것이 포함되어 있다。아쉽게도 더 중요한 반성은 들어 있지 않다。역시 일본인이다 싶다。
잘한 것은 본받을 필요가 있다。지금으로 말하자면 규제완화와 같은 혁신적이고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그리고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라쿠이치 라쿠자를 지금으로부터 거의 500년 전에 실행실현했다는 것은 대단한 혁신이 아닐 수 없다。일본에게 부러운 것은 이런 점이다。모든 것을 다 장악한 최고의 권력자인 오다 노부나가는 거액의 세금과 정치 자금을 대고 있는 거부들을 거스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대상인들과 비교할 수 없이 빈곤하고 초라한 상인들의 편을 들어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다。자연스럽게 비교되지 않을 수가 없다。번번이 최고권력자에게 빌붙은 한국 재벌 기업의 행태가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받거니 주거니 하며 재벌들에게 더 유리한 법을 만들어 보답한다。상속세나 재산세、법인세 등의 감면。。。 대형마트에 손님을 빼앗긴 지역 상인들을 위해 프랑스에서 실시되고 있는 서민정책인 '대형 마트에 일요일 판매 금지'를 한국에서도 일부 받아들여 한 달에 두 번으로 제한해 왔던 것을 다 풀어 대형마트의 365일 종일 영업을 허가해 주려고도 한단다。알다시피 대형마트는 국내 유수기업 재벌들이 사주다。재벌들을 더 키워주며 소상공인을 죽이는、역행퇴행의 세계로 서민의 삶은 더 힘들어지고 있다。
이미 400여 년 전 이웃나라 일본의 권력자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버리고 더 많은 상인들에게 돈 벌 수 있는 기회의 길을 터줬다는 라쿠이치 라쿠자와 비슷한 것이 한국엔 있었나? 바로 떠오르는 건 지난 코로나로 붕괴 직전에 이른 영세상인과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고안하고 시행된 어느 지자체의 지역화폐가 그와 유사한 것이다。이후 전국으로 확대되긴 했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이 마저도 100만 원에서 70만 원으로 깎아 버렸다。처음에는 지역화폐 자체를 다 없애려고 했었다。더 한심한 것은、한국 언론이다。제대로는 커녕 악의적 보도만 하고 있고、이런 가짜 뉴스보도만 믿는 국민들이 대다수라니。。。 한국 언론만이 아니다。동네 곳곳에 붙어있는 현수막에는 이러한 서민을 위한 정책을 극구 반대하던 정치권에서 오히려 자기네들이 해낸 것 같은 문구를 걸어 놓고 조국이 가진 국민의 힘을 또 기만하고 있다。언론과 현수막까지 장악하며 호도를 넘어 거짓으로。。。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을 그 조금을 생각하지 않는 국민、한국인이 아닌가。그저 큰 언론과 방송에서 떠들면 다 믿어 버리기 때문이다。자기의 생각을 그런 방송이나 언론에게 넘겨주는 일은 자기를 버리고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도대체 자기는 있는가。이미 2000년 전에 한 철학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가장 짐승에 가까운 사악한 정치에 자신을 맡기는 것과 같다。”
400여 년 전 이웃나라 일본의 개혁 정책 하나로도 부러운 건、지금도 제대로 못하는 한국、하려 해도 지지 않는 한국민、오히려 반대하는 한국 국민으로 낙망하고 절망감이 들어 이웃 나라의 과거 하나가 부러운 것이다。좋은 것은 늦게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세를 내 입속에서만 웅얼거려 본다。흉내 낸 적이 여러 번 있었다。그 중 하나가 유신인데 백년 지나 메이지유신을 받아들인 10월유신이란 것은 그저 단어만 훔쳐온 것 뿐이고 속을 들여다 보면 바꾸자는 유신이 아닌 한 개인의 정치야욕뿐이었다。또 여의도에선 국풍 81이라 하여 300여 년 전 일본의 국풍을 베껴왔지만 1981년도의 여의도는 포장마차 잔치로 먹고 마시고 떠드는 데에 그쳤다。흉내라도 내려거든 비슷하게라도 해야 되는데 비슷은 커녕 국민을 우롱한 것 외에는 없다。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 잘못이 거듭되는 한국、도대체 왜 이럴까?
'좋은 것은 받아들이되 제대로!'
너무나 상식적인 말을 하면서 헛웃음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공동체란 단어가 다수결의 민주주의에선 오히려。。。 이런 자괴감이 들어서일까。민주주의 정치의 다수결이 오히려 악의의 소수 정치인집단에 의해 국민을 바보(중우)로 만든다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민주주의의 폐단을 인정해야 되는 것인가。이러면서 헛헛하게 웃던 나는 2000년 전과 달리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데 더 앞장서서 기여하는 한국 미디어(언론)에 고개를 떨구고 만다。전직 기자였었다는 게。。。
한국의 이런 언론들을 보고 다시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가 보면 뭐라 할까? 그도 나처럼 '뭐 어쩔 수 없는 이 난장판' 하며 이렇게 웃기만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