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희『나다운 집찾기』파이퍼프레스 2024
이 집에 살고부터는 오후 5시를 기다리게 된다는 지훈 님의 말이 아직도 귓가를 맴돌아요.
p60 전명희, 『나다운 집찾기』,파이퍼프레스 2024
내가 지금 사는 집에 살지 않았더라도 오후 4시 쏟아져 들어오는 늦은 햇볕을 사랑했을까? 맞은편 아파트 8,9층까지 당당히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어 올린 거대한 침엽수와 활엽수의 앙상블이 없었다면, 그 지난한 신생아 육아를 버텨낼 수 있었을까? 오후 5시를 기다리는 손님에 대해 쓴 부분을 읽다 나 역시도 이 집에 살았기 때문에 오후의 햇살을 알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이 집에서 십 년을 살았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집은 의미가 없었다. 아기가 주는 의미가 집의 의미를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새로운 세상이란 장소가 아니라 행동"(양창모『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중)인 것처럼 아기를 가지고 낳는 그 모든 과정이 집의 의미를 바꾸었다. 아기를 낳기 전에 집은 정거장이자, 침대였다. 이른 아침에 나서 자정이 다 되어 집에 돌아오는 사람에게 집은 그 이상이기 어렵다. 물건을 잘 적재하고, 주말에 빨아놓은 깨끗한 이불에서 푹 자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집이 남향향인지 동향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살아왔던 그 모든 집의 방향을, 향방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에도 집이 비춰진 햇살의 영향을 받고, 그 공간이 나를 만들고 내가 그 공간을 만들어 왔지 싶다. 아기를 낳고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강제로 늘었다. 하루종일 집에 있는 날이 한 달 내내 계속되었다. 온종일 누워 해가 들고나는 그림자를 살펴보았고, 그리고 집구석구석을 전장 삼아 겪어본 적 없는 돌봄 노동을 이겨냈다. 덕분에 작은방에서 해돋이가 오롯이 아름답게 보인 다는 것을 깨달았고, 원래도 잠이 없는 편이지만, 이제는 계절에 맞춰 기상시간이 바뀌는 인간이 되었다.
북향은 우리 생각처럼 깜깜한 향이 아니에요. 온종일 균일한 조도가 유지되는 향입니다.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나 독서, 영화 감상 등을 위한 공간으로 안성맞춤이죠.
(중략)
역광인 남향과 달리 북향은 눈부심이 적어 깨끗한 파란 하늘을 더욱 잘 감상할 수 있다는 포인트도 있어요.
p35~36
"떠돌던 건설 현장의 숙소에는 희한하게도 북쪽 벽에 큰 창이 나 있었다. 새어 드어오는 것도, 쏟아져 들어오는 것도 아닌, 왠지 조심스레 실내를 감싸 안는 부드러운 북쪽의 빛, 동쪽 빛의 총명함이나 남쪽 빛의 발랄함과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은 듯 고요한 노스 라이트"
p41~42
공간이 어떤 시간에 어떤 빛을 받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체감하고 있었는데, 명확한 문장으로 건져낸 집이 품어내는 빛과 공간의 쓸모는 다른 기대를 품게 만든다. 해돋이 시간 30분 전부터 저 멀리 젊은 푸름에서 서서히 번지는 하루를 보며 책을 읽는 지금을 너무 사랑하고, (아마도 북동쪽을 향한 작은베란다 인 거 같고요... 아직도 어려운.. 향방..'동쪽 빛의 총명함'을 아침에 썼구나 싶고) 언젠가 '깨달음을 얻은 듯 고요한 노스 라이트'를 배경 삼아 내 작업을 한껏 하는 진짜 작업실을 꿈꾸게 된다.
재건축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갖기보다는 집 자체의 발전 가능성을 떠올리며 이 집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변하게 될지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줬으면 했어요.
p52
최근에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고유성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은 어떤 자리에서는 하염없이 초라해지게 만들고, 다른 어떤 자리에서는 한없이 반짝이게 한다. 고유성에 집중하면 사실 어떤 일에 대해 잘하고 못하고를 평가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저 적절한 자리와 순간들이 아직 오지 않은 게 아닐까 싶다. 영영 못 찾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운이 좋게도 단번에 아는 사람도 있는 게 아닐까.(그게 성공이려니 한다.) 곰곰이 살펴보고 인정해야만 그다음이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헌데 집에게도 있다니 " 집 자체의 발전 가능성" 이라니! 오래된 건물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살펴보는 방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준다. 막연히 좋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조금 끌린다고 생각하는 공간들을 어떻게 뜯어볼지 새삼 읽는 내내 신이 났다.
기존의 기준을 적용하기보다는 심리적인 구조를 확인하는 게 좋습니다. 예를 들어 현관에 들어섰을 때 내가 마주하고 싶은 풍경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고, 식탁에 앉았을 때 화장실을 마주하게 되진 않는지, 작더라도 빨래를 건조할 수 있는 외부 공간이 있는지, 나의 신체 비율에 적당한 면적과 높이를 가졌는지,
p106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이상향에 대해서도 구체화시킬 수 있게 돕는다. '나'라는 사람과, 내가 꿈꾸는 '공간' 그리고 수많은 '선택지'들을 잇는 예민하고 섬세한 선을 그려보게 한다. 인구의 1/5이 서울에 뭉쳐사는 서울공화국에서 부동산의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마천루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 빽빽한 도심에 내 몸 하나 뉘 일 곳 없겠냐는 한숨은 정말 오래되고 낡은 클리쉐다. 책을 통해 지나친 웅성임과 뻔한 이야기를 털어내고 섬세한 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공간에 들어설 때마다 내가 내 기분을 살피고, 내 마음이 이 공간에 동하는 모습을 살핀다.
여러분도 그동안 모아두었던 이미지들을 잠시 내려놓고 그간의 경험을 돌이켜 내 감각이 좋다고 말하는 것들을 떠올리고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내가 살았던 집에서 좋았던 부분들만 골라서 덧붙여 나가는 게 아니라 나에게 꼭 필요한 요소들을 발견하는 게 포인트예요. 제한된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만큼 덧셈과 뺄셈을 잘해야 해요. 집은 우리 삶의 안정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p150
나에게 꼭 필요한 요소들을 발견해야 한다니, 심화풀이처럼 어려워지는 책장을 넘기며 묘하게 신이 났다. 경험에 기대 좋은 것만을 만나면 결국 막히게 되는 부분들이 있다. 한 문장이지만, 그 걸 넘으라고 등을 밀어주는 이 문장이 얼마나 든든하고 의지되는지. 마치 수학심화반 선생님이 나는 나의 가능성을 모르지만, 본인은 알고 있어서 나에게 어려운 문제를 주며 온화하게 웃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내가 아니라, 우리 학교 수학심화반 선생님의 권위에 의지해 나를 밀어내보는 것.
에디터로 일하면서 만난 건축가와 디자이너들로부터 '사는 곳이 정형화되면 생각도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특별한 구조를 가진 집에서의 독립을 꿈꿔왔었다고 해요.
"p72
친구를 초대하지 않은지 정말 오래되었다. 아기가 어린이가 되는 시간은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는데 그중 하나가 친구를 초대하지 않는 삶이다. 호스트가 되려면 많은 것들이 필요한데, 가장 우선은 호스트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누구를 초대해서 좀 자랑을 하고 싶다거나, 혹은 편하게 쉬게 해주고 싶다거나. 하지만 당장 코앞의 육아와 일의 줄다리기를 하며, 일상과 살림을 근근이 버텨나가는 전쟁터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몇 해 전 어린이가 한 달간 집을 비우고, 내 마음에도 호스트의 여유가 생겨 보름이나 바지런히 쓸고 닦고 애정하는 친구들을 불러서 간단히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이때의 모임은 지금도 꾸준히 회자되는데, 나를 오래 깊게 알아온 친구들에게 이 공간은 너무 낯설었던 것이다. 내 집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결코 내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 집은 전형적인 어린이를 키우는 20세기 집이었다. 더군다나 그 와중에도 취향과 무관하게 물리적인 자리를 잡아야만 하는 세 개의 세계가 서로 터져나가라고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 표현도 친구의 표현이었고, 역시 문장이 되고, 발화가 되어야 명확해지는 인생이여) 서울의 32평 방 3개, 화장실 2개의 집. 거실에는 어린이 책장과 장난감과 보드게임 무더기가. 한 켠에는 수족관을 떼어놓은 것 같은 어항 무더기. 그리고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는 책.(비로소 이것이 나이다. 어딘가.... 있을 수 있는) 지난 몇 해간 이 경험은 내 안에서도 계속 회자되었는데, 어린이를 키움으로 인해서 전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게 된 '집'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 있는지.
사람의 감정이 쌓이고 모여 건물 속에, 거리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런 감정의 냄새가 공기에 응축되어 동네의 바이브를 만들어요. 활기가 느껴지는 에너제틱한 바이브가 있는가 하면 차분함이 느껴지는 정적인 바이브도 있습니다. 내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 그 동네에서는 어떤 바이브가 느껴질지 이 기회에 한 번 상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p76
나라는 존재가 집으로 확장되고, 내가 확장되어 동네가 되고 또 이 많은 동네들이 확장되어 여기 이 세계가 된다고 믿는다. 조금 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리를 고쳐 앉으려고 한다. 지금 가는 길이 틀려도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1도만 바꿔 걸어도 그곳이 아니더라도 그 근처 어디 닿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아는 나와 너무 다르다는 내 '집'에 대한 평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그래서 내가 집에서 쉬지 못했구나.(아니다. 집에 오면 정말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어서 못 쉰다.) 집이 나에게는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구나. 그렇다면 동네라도 그런 곳으로 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나는 다짐만 비장하게 하고, 이제 청소년이 될 어린이를 위한 선택에 골몰할 것이다. (이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내가 뭐라고 인생의 전반적인 무드를 결정하는 청소년기를 보낼 동네를 정해버리느냐 말이다....)
그럼에도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