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가워졌다. 계절은 하루 만에 겨울문턱을 훌쩍 넘어버린 듯하다.
아침에는 두꺼운 옷을 챙기라고 큰아이와 작은 실랑이를 했다. 곧 추워도 패션을 고수하시겠단다.
몇 번을 더 권하다.
' 그래라. 니가 추워봐야 정신을 차리지?' 란 생각에 너 입고픈 대로 입고 가라 타협했다. 타협이라기보다 내가 졌다.
아파트 저 아래 걸어가는 아이를 보니 찬 바람에 옷 깃을 여미는 게 보인다.
쌤통이다 싶으면서도 지금이라도 두꺼운 옷을 챙겨 내려갈까 싶었다. 현관 손잡이까지 잡았다가 끝까지 지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냥 두기로 했다.
한파주의보가 울릴 만큼 기온이 뚝 떨어졌다. 떨어진 기온만큼 아침 햇살은 쨍하게 맑아진 것 같다.
입김이 제법 나오고 길거리의 학생들의 옷차림이 도톰해졌다.
8시 제일 어린 유치원생을 시작으로 15분 간격으로 나머지 두 딸들이 등교를 하면 비로소 집안에 정적이 찾아온다.
정적과 함께 온갖 옷들이며, 아침 식사의 흔적이며, 빨랫감과 청소거리들이 눈을 파고든다.
오늘은 햇살도 좋기에 창가에 앉아 커피부터 한잔 하기로 했다.
바쁘게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니 창가의 커피 한잔이 대단한 여유처럼 다가왔다.
횡단보도의 녹색 어머니회 깃발이 어제보다 더 힘차게 흩날리는 걸 보니 체감온도는 더 추울 듯싶기도 하다.
겨울은 싫다.
가을부터 줄어든 일조량에 멜라토닌 호르몬은 증가하고 내 기분은 멜랑꼴리 해진다.
게다가 이맘때면 잊기 힘든 기억이 스믈스믈 곁을 맴돌곤 한다. 동생과의 이별이 이 무렵이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겨울의 시작쯤
시기적으로나 생체학적으로나 이 무렵이 나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줄 건덕지는 그리 많지 않다.
높은 가을 하늘의 청명함과, 산책하기 좋은 온도의 짧은 가을을 즐기다 보면 스리슬쩍 겨울이 곁은 차지한다.
티브이에서 보던 큰 구렁이처럼 움직이는 지도 잘 모르겠는 움직임으로 내 주위에 또아리를 틀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서늘한 뱀의 비늘 같은 겨울이 시작된다. 예쁘기도 하지만 온기를 느낄 수는 없다.
이번 주에는 김장을 한다. 아직도 외가 식구들이 총출동하는 김장은 우리 집안의 가장 큰 연례행사다.
아버지가 취미로 하시는 밭에서(취미라고 하기엔 그 평수가 좀 넓긴하다) 김장 배추와, 고추, 갓, 무, 깨 등 모든 재료들을 수확해
11월 둘째 주의 주말에 김장을 한다.
200여 포기 전후의 배추를 밭에서 수확하는 동시에 밭 옆에 붙은 비닐하우스에서 다듬고 절인다.
이 모든 시스템을 아버지께서 만들어 놓으셨다.
첫날 배추를 뽑고, 다듬고, 절이면 둘째 날 배추 속을 만들고, 버무리고, 각자의 김치통에 담아 저녁이 되어 헤어진다.
그렇게 나온 김치통은 집당 10개 전후로 대략 5-60통의 김치통이 채워진다. 이 행사를 위해 아버지는 여름 내내 밭에 사신다.
이렇게 김장을 끝내면 겨울이 좀 든든해진다. 주말에 시작될 이 행사를 생각하니 벌써 근육통이 오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 행사를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조금은 서글퍼진다.
가을의 결실을 만끽하고 찾아오는 겨울의 황량함과 쓸쓸함을 자꾸 인생도 그러한 것 같아 서글프다.
조금씩 이별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생각이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다
그 겨울의 시작이 오늘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