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준 Jan 30. 2024

(완결)나는 이렇게 10년을 보냈다.

나는 괜찮을 줄 알았다. 내 인생에 있어서 큰 굴곡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가끔 힘든 일이 있어도 늘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라 여겼고, 나름 무난하게 극복하면서 살았다. 성준이의 죽음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첫 몇 개월은 마무리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서류 정리, 짐 정리, 채무 정리 등 떠난 자의 남은 것들은 정리해야만 했다. 시간은 금방도 흘렀다. 그 사이 아이도 태어났고, 난 또다시 정신없는 육아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첫 명절이 다가왔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사람은 티가 난다고 성준이의 빈자리는 지나간 시간이 무색하게 금방 티가 났다. 티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성준이를 성묘 가는 상황이 벌어지니 성준이의 빈자리가 도드라졌다. 1년의 시간은 한 편으로 그리 긴 것도 아니었다. 명절 성준이를 성묘하러 가는 길은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가장 어린 동생을 형이, 아버지가, 어머니가 성묘를 간다고 생각하니 몰라도 사연 있는 집이겠구나 생각할 듯싶었다. 반년의 시간 동안 겨우 돌아온 일상이 다시 그때로 끌려내려 갔다.


슬픔을 가장 잘 극복하는 방법은 현실을 잘 사는 것이다. 현실의 삶이 잘 굴러간다면 상처도 금방 아물 수도 있다. 어쩌면 상처가 잘 아물어야 현실의 삶이 잘 굴러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두 가지 모두 잘 못했기에 어느 쪽이 정답인 지 알려줄 수가 없다. 난 상처의 봉합도, 현실의 삶도 모두 거지 같았다. 성준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나의 삶은 소위 내리막이었다. 점점 작아지는 회사와 사회적 지위, 결국엔 종업원 없는 자영업 스스로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였다. 내면에 꾹 꾹 눌러서 봉인했다. 수많은 화와 분노를. 그렇게 배출하지 못하고 내 안에 쌓아두었다. 출구가 없는 사해는 소금기를 배출하지 못해 그 농도가 짙어져 더 이상 생물이 살 수 없는 바다가 된다. 내 감정이 그랬다. 어느새 감정이 죽어있었다. 그러다 성준이의 죽음을 계기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너진 자존감은 이상한 방식으로 주변 사람을 괴롭혔다.


 세상의 모든 일이 내 잘못 때문이라 여겨졌다. 모든 말 끝은 "그래 다 내 잘못이다"라고 끝이 났다. 나와 관련이 있건 없건. 그러고는 비아냥으로 받아쳤다. 소통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다툼의 연속이고 일상화되었다. 와중에 처형이 병원에 입원하셨고, 아이 다섯을 돌보며 화가 심해졌다. 모르게 욱하는 횟수가 많아졌고, 고함이 늘어만 갔다. 나도 내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몇 년간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내 인생을 탈탈 털었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유년 시절의 서운함, 제대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박탈감 등 나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재 내가 놓은 상황을 이해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서운함을 꽤 오랜 시간을 쏟아부었다. 처방받은 알약과 함께 나의 감정의 진폭은 작아졌고, 화도, 기쁨도 그 폭을 낮추었다. 멍하지만 평안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내겐 약이 도움이 되었다. 선생님은 우울증은 감기와 같은 거라고, 단순히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몸이 아픈 것과 같다고 약에 대한 두려움을 낮춰주셨고, 다행히 내게는 잘 통했다.


몇 년을 미루던 일을 시도했다는 작은 성취감과, 도움이 되는 약일 거라는 플라세보 효과까지 더해져 내 치료는 긴 시간을 필요치 않았다. 다행히도. 6개월 정도 약을 복용하고는 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순간까지 왔다. 몇 년이 되지 않은 이야기다. 그 이후로도 때때로 계절성 우울증이 도지긴 하지만 예전처럼 깊게 할퀴지도 오래가지도 않는다. 헤어 나온 경험이 극복하는 방법을 남기고 간 것 같다.


나에게는 외부의 도움이 효과가 있었다. 혼자 끙끙 앓고 있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꽤 빠르게 몸도 마음도 나아졌다. 미련함이 병을 키웠고, 시간을 낭비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추천하지 못한다. 그들은 내가 아니기에 나의 방편이 통할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롯이 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도움이 필요했던지도 모른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헤어 나오고자 노력한다. 누구나 그렇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그 상처들을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이 그렇다.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도움받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도움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상처가,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상 주위의 조언도, 관심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때까지는 상처받은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그래도 그들을 돕고 싶다면, 그들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래서 눈을 주위로 돌렸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을 거리에 있으면 된다. 그럼 눈에 보이는 당신에게 손을 내일 것이다. 나는 그랬다.


지난 십 년을 돌아보자면.. 그리 꺼내고 싶은 이야기들은 아니다. 상처받았고, 우울했고, 무엇을 해도 즐거움을 잘 느끼지 못하던 시기였다. 스스로를 작은방, 작은 집, 작은 사회에 가두어 두었다. 관계를 잃었다. 극단적으로 연락을 나누는 사람들이 줄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 자체가 싫어졌다. 모두 날 비난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성준이로 인해 벌어진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지 방아쇠가 되었을 뿐, 내가 가진 문제점들이 그 사건을 기점을 폭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폭발하기 좋은 핑계가 생겼던 셈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터져버린 문제는 원래 멀쩡하던 것들까지 잠식해 버렸다. 의도치도 생각지도 못했던 부작용이었다.


결국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시간과, 도움. 상처의 시간이 흐르자 아픔이 무뎌졌다. 반복된 아픔에 역치가 높아져 더 이상 아프지가 않았다. 으레 있는 있어 되었고, 점차 상처에서 덜 눈물지을 수 있게 되었다. 상처가 나았다기보다, 상처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살 수 있게 되고, 이렇게는 안된다는 스스로의 자각에 도움을 찾게 되었다. 몇 년을 미루던 병원을 방문한 것이 내게는 큰 효과를 주었다. 누군가는 근본적인 치료 없이 단순히 약으로 증상을 낮춘 거라 말할 수 도 있다.


그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증상을 낮추고, 그 시선으로 상처를 바라보니 덜 아프게 보인 것이다. 아프고 슬프지만 내가 그렇게 아무것도 못할 것이 아니게 느껴졌고, 나는 그 상처를 조금씩 극복한 것이다. 치료의 선후가 어떻게 되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떤 방법이 근본적인 치료법이 될는지도 모른다. 내게는 증상을 억제하는 것이 최우선을 목표였을 뿐이었고, 다행히 내게 맞는 방법이었다.


상처와 치료는 지금도 내게 진행 중의 이야기다. 가족을 잃은 상처를 어느 순간에 완치되었다 말하기는 어렵다. 아마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할 문제다. 그저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을 해도 다른 일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익숙한 일이 되어야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십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지금까지 내 동생 성준의 이야기였다면, 앞으로는 나의 또 다른 이름 성준의 이야기가 시작돼야 할 것이다. 필명으로 지을 때까지만 해도 단지 그리움에 부르던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성준]이라는 단어가 나와 동생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된 것 같다.


성준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지키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이전 11화 우주가 빛을 잃지 않기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