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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Jan 09. 2024

A.D (After Death)

일상은 곧 회복된다. 아니 회복이 아니라 돌아와야 한다. 살아야 하니까.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매일의 해가 뜬다. 해가 뜨고 밭에 나가 일을 해야 가족을 부양한다. 그런 줄 알았다. 모두가 그렇게 돌아올 줄만 알았다. 


가족을 심었지만 가족은 살아야 한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시인은 어머니 시신을 모신 관이 흙에 닿는 순간을 바라보며 '묻는다'는 동사를 쓰지 않고 '심는다'고 표현한다. 어머니를 심는다고.


"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마세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 


우리 가족도 성준이를 심었다. 가슴에 심고 흩뿌렸다. 이제 성준이는 떠났다. 다시는 마주하지 못한 그곳으로.


성준이를 보낸 후의 일들은 내가 처리하기로 했다. 가족의 아니 아들의 사망신고를 해야 하는 짐을 부모님께 지우기가 싫었다. 동사무소에 방문해 사망신고를 했다. 주민등록등본을 떼는 것처럼 간단했다. 몇 가지의 서류에 인적 사항을 적고 나면 끝이다. 이제 성준이는 공식적으로 세상에 없다. 사망한 것이다. 공적인 고인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사람이 죽게 되면, 생전의 재산이나 채무를 정리해야 한다. 어디서 알고들왔는지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기 시작한다. 주로 은행들이다. 통장에 남아있는 현금들. 그리고 대출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유족들과 협의를 한다. 성준이는 빚이 약간 있었다. 살던 집의 보증금으로 빚을 갚았다. 혹시나 우리가 알지 못할 채무가 튀어나올까 봐 한정승인도 신청해 두었다. 한정승인은 말 그대로 고인의 재산만큼만 빚을 감당하는 것이다. 유산이 100이고 채무가 120이어도 100만큼만 유족이 책임을 지는 것과 같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준이의 채무 관계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정리되었다. 아주 큰 빚을 지고 있지 않은 경우라면 어렵지 않다. 마음에 상처만 생길 뿐 하는 일은 쉽다. 몇 번의 통화와 금액을 송금하면 된다. 


49재가 왔다. 이제 망자의 혼이 이승에 남아 있는 마지막 날이다. 오늘로 망자는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 날이다. 이제는 성준이의 혼과도 작별하는 날이란다. 고맙게도 성준이의 친구들이 와주었다. 장례식보다는 차분한 모습으로 왔다. 얼굴은 반가웠지만, 그 기분을 드러내기에는 자리가 너무 아픈 자리였다. 


"잘 지냈니?"

"저희야 잘 지내고 있지요. 형님이랑 부모님은 어떠세요? " 

"뭐.. 지내고 있지 뭐... 잘은 아니더래도.."

"참 형수님은 이제 며칠 안 남으신 거 같은데.."

"응 13일 날 출산 예정이야. 저 아이는 삼촌 얼굴도 모르네.."

"그러네요.. 참.. 형님 성준이는요...."


수몰된 마음이 내려다보이는 호수 주변에 납골당이 하나 있다. 친구들은 성준이를 그곳에 안치했다. 수목장을 할까. 바다에 뿌려줄까 친구들도 고민이 많았는데 나중에라도 보고 싶어지면 찾아올 수 있게 납골당에 성준이를 모시기로 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내심 강에라도 뿌렸으면, 바다에라도 뿌렸으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어딘가로 성준이를 찾아갈 수 있는 장소가 있기를 바랐다. 그래야 세상에서 성준이의 흔적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차마 가족들과 함께 갈 수가 없어, 따로 시간을 내었다. 납골당은 아파트다. 

차곡차곡 영가가 들어선 아파트 같았다. 어딘지 몰라 한참을 두리번 성준이를 찾았다. 성준이는 잘 있었다. 그 사이 다녀간 친구들이 허전하지 않도록 생전 함께 찍은 사진도 넣어주고 꽃도 넣어주고 편지도 써주었다. 하나하나 읽고 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리움보다 제일 많이 드는 생각은 후회였다. 내가 제대로 형 노릇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가족을 열심히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성준이의 아픔과 상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모든 것에 대한 후회의 감정들이 그리움을 앞서 물밀듯 들이닥쳤다. 아팠다. 모든 게 내 잘못 같아서 아팠다. 후회와 미안함의 감정들이 내재되어 감정을 뒤흔들었고, 나는 성준이의 유골 앞에서 미안하다는 말만을 울음과 함께 내뱉었다. 


그와 함께 했던, 함께 하지 못했던 그 지난날들이 후회스러웠다. 

나는 지나간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 나 스스로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참을 그의 앞에서 미안하다 미안하다며 사과만 하다 나왔다. 


가슴 아프면서도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마웠다. 잘 있어라... 여기에서...




그 사이에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성준이를 보낼 때 임신 중이던 아내는 1월 초에 출산을 했다. 이 아이는 삼촌의 얼굴도 한 번 못 본 아이가 되었다. 아마도 삼촌이 있었는지도 모를지도 모른다. 내가 고모들의 존재를 몰랐듯 이 아이도 그럴까 봐 걱정이다. 벌써부터 성준이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꼬물거리며 젖병을 문다. 빠알갛게 홍조 띤 얼굴로 열심히도 분유를 마신다. 아이에게 남아 있는 것은 생존에 대한 본능 하나로 열심히도 젖을 찾고 분유를 마신다. 이 핏덩이 같은 아이도 살고자 한다. 못난 녀석이다. 성준이는 


겉으로 달라진 일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성준이에게 전화가 오는 일은 없었고, 얼굴 보는 것도 자주 가 아니었기에 허전함도 덜 했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하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어느 날 서류를 제출해 달라는 요구에 서류를 들고 방문했다. 내가 제출한 서류를 유심히 보시더니 


"서류 발급일이 3개월이 넘으셔서요. 새로 발급받으신 서류로 제출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서류 발급 일이 경과되어 새로이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고 했다. 벌써 삼 개월이 흘렀다. 


시간이 멈출 거라고 믿었고, 세상이 멈출 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순간에도 시간은 흘렀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멈춘 적이 한 번도 없더라. 새로이 증명서를 발급받아 나오면서 한동안 멍했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에. 그래도 나는 살아가고 있다는 미안함에. 와중에 배가 고프다고 느끼는 내 몸뚱이에 웃다가 어이없어하다 결국 눈물을 찍어내었다. 나는 살아가야 하구나. 나는 살아있는구나. 이렇게 살고 있구나. 


나는 내가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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