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꺼진 적이 없다. 항상 그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마도 우리 삶을 기점으로는 영원에 가까운 정도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겠다. 항상 태양은 존재했음에도, 빛이 존재했음에도 우린 어둠과 밤을 맞이하곤 한다. 기초과학은 무시하자. 그 옛 시절로 돌아가자. 우리는 태양이 계속 빛나고 있는지 몰랐다. 태양은 수면아래로, 높은 산 아래로, 때로는 알 수 없는 서쪽 땅끝으로 사라졌다. 다시 떠오르는 존재였다. 아무도 이유를 몰랐을 거다. 어쩌면 지금도 원리만 남았을 뿐, 이유는 누구도 모른다. 그렇게 움직여야 하는 이유를 말이다.
태양은 매일 같이 뜨고, 졌다. 십 년 전의 태양도 어제의 태양도 내일의 태양도 그럴 것이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낭만이 없는 지금은 지고 뜨는 태양을 보고 지구의 자전을 떠올리겠지만, 그 옛 시절 사람들은 뜨고 지는 태양을 보고 어떤 낭만을 가지고 있었을까?
북유럽 신화의 솔은 태양의 여신이다. 그녀는 매일 하늘을 가로지느며, 태양을 운반하는 마차를 몬다. 그 마차를 쫓는 거대한 늑대 스콜에 쫓긴다. 어둠과의 추격적을 그리고, 세상의 종말을 상징한다.
아즈텍 신화의 토날틴은 세상을 비추기 위해 신들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희생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고, 아즈텍 문화의 종교적 희생제물과도 연관이 있다.
힌두 신화의 수리야는 태양신이다. 건강, 번영, 승리의 신으로 종종 일곱 마리 말이 끄는 황금마차를 타고 하늘을 가로질러 여행을 한다.
아프리카 신화의 로아는 태양과 동시에 달의 신이다. 낮 동안은 태양으로 밤 동안은 달로 존재한다. 이중적 존재는 균형과 조화를 상징하며, 생명의 주기와 관계가 깊다.
알 수 없는 이유지만,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현상에 우리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주곤 했다. 그 이야기에는 낮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낮에 관한 이야기에도 항상 밤이 존재한다. 낮의 태양을 쫓는 스콜이 그러하고 로아는 낮과 밤 동시에 존재하기도 한다. 늘 그렇듯 살아감도 그러하다. 밤을 그리워하고, 탐닉하지만 나는 낮에 살아가고 있다. 생존에 대부분의 것들이 낮에 이루어진다. 밤은 그저 탐닉의 시간이다.
어쩌면 낭만이 있는 시기가 더 창의력이 풍부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그 창의력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커져서일까? 창의적인 생각의 한계가 실현 가능성이라는 경계에 아슬아슬 접해 있는 것 같다. 저 우주 위에 달리는 커다란 개 같은 상상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창의력은 한계가 없다 말하지만, 오히려 기술에 족쇄에 창의력의 풍선은 지상 몇 백 미터를 한계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같다.
모든 옛이야기에서 보듯 태양은 많은 것을 내어준다. 곡식도, 열매도, 에너지도, 삶도, 태양에서 비롯된다. 숭배되기 당연하다.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존재를 배척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반대급부로 어둠이 배척당했다. 태양과는 받대 편에 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이 늘 배척받아온 건 아니다. 어둠은 항상 매니아틱 한 팬들이 존재했었다. 어둠이 명맥을 이어온 것은 단순히 존재해서가 아니다. 어둠이 어둠으로서 가지고 있는 그 매력 때문이다.
때로는 대부분의 낮의 이야기보다 소수의 어둠의 이야기가 매력적일 때가 있다. 늘 그러하다면 식상하겠지만 언제고 적은 것, 수가 없는 것, 희귀한 것에 우리는 눈을 빼앗기기 마련이다. 이제 시작할 것은 밤의 이야기
낮과 밤의 이야기는 낮에서 시작하지만 늘 그렇듯 밤에 끝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