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인류에게 밤은 얼마나 낯설고 두렵고 신기했을까? 태양이 사라지는 순간 익숙했던 모든 공간이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을 것이다. 변한 것이라고는 빛이 사라졌다는 사실뿐인데, 익숙했던 공간을 잃고, 낯선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낯익은 공간이 낯선 공간으로 변해버렸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고, 빛을 대신해 끝을 모르는, 보이지 않는 심연이 된 어둠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둠은 아무리 작은 공간도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으로 확장되어 버린다.
고작 열 걸음을 걸을 수 없는 작은 방도 한 치의 빛이 없는 공간이 되어버리면 끝을 알 수가 없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경계인지도 알 수가 없다. 보이는 모든 것이 끝이 없는 무한함속에 갇혀버렸다. 심지어 위아래의 구분마자 모호해지는 공간이 되어버린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한다. 한 치는 길이의 단위로 한 자 약 30Cm의 십 분의 일의 길이다. 3Cm 정도가 한 치가 된다. 바로 한 치 앞으로 볼 수 없는 어둠이란, 눈을 감고 있는 정도의 어둠 속을 말한다. 시각의 역할이 되지 않는 어둠 속. 이는 실제적인 의미보다, 답답한 상황을 표현하는데 더 적절한지 모른다. 불안한 미래, 알 수 없는 상대방의 심중등의 복잡한 상황을 표현하는데 더 잘 어울린다.
어둠이 내포하고 있는 이미지는 그러하다. 낯선, 불안함, 신비로움, 두려움, 알 수 없음 등 온갖 비밀스럽고 조심스러운 모든 것들을 담고 있는, 그래서 온갖 위험하고 낯선 것들을 탄생시키는 어둠을 우리는 두려워하곤 했다.
노르웨이 신화에 등장하는 두 마리의 늑대, 스콜과 하티는 태양과 달을 각각 쫓는 존재다. 이들의 추격은 낮과 밤의 교차, 그리고 천체의 운동을 신화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라그나로크(세상의 종말)가 도래하면, 이들은 결국 태양과 달을 잡아먹어 어둠이 전 세계를 뒤덮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신화는 밤과 어둠이 결국 모든 것을 삼킬 운명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을 상징한다.
누트는 이집트 신화에서 하늘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그녀의 몸이 밤하늘을 형성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누트는 매일 저녁 태양 신 라를 삼키어 어둠을 가져오고, 다음 날 아침 다시 그를 출산함으로써 낮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은 자연 세계의 영원한 순환과 밤과 낮의 교차를 상징한다.
마오리 신화에서는 테 포(어둠)와 테 아오(빛) 사이의 이야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초기에는 모든 것이 테 포, 즉 끝없는 어둠 속에 있었다. 신들은 자신들이 있는 공간이 너무 좁다고 느끼고, 부모신인 랑기(하늘 아버지)와 파파(대지 어머니)를 분리하여 테 아오, 즉 빛과 삶의 세계를 창조한다. 이 과정에서 밤과 낮, 어둠과 빛의 개념이 탄생한다.
서아프리카의 여러 문화에서 전해지는 안안시 이야기는, 주인공인 거미 신 안안시가 밤과 관련된 다양한 모험을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안안시는 지혜와 교활함의 상징으로, 어둠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어둠과 밤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과 변화의 힘을 상징한다.
인간에게 낮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데로 믿기만 하면 되었다. 원인과 결과가 눈에 보이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씨앗에서 눈이 자라고 잎이 돋아나는 것이 보이는 것처럼,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것이 보이는 것처럼 원인과 과정도 직접 보고 익힐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낮은 이성적으로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밤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겠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낮을 통해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배워왔는데 이를 밤에 그대로 가져다 쓰려니 보이지가 않는다. 무엇을 통해서 밤을 설명해야 할지 조차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밤에 가져오기까지 우리에게 밤은 그저 동굴 사이에서, 바위사이에서 몸을 웅크리며 지나가기를 바랬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빛을 덮어버리면 인간도 몸을 감추고 죽은 듯, 모든 것을 멈추었을 것이다. 마치 죽은 자들처럼.
살아있는 자들도 죽은 자처럼 제대로 활동할 수 없는 시간이기에, 우리는 밤을 죽은 자의 시간이라 불렀는지 모른다. 밤에 움직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그것이겠다. 인간은 밤에 움직여서는 안 되는 존재였는데 그 룰을 깨버리고 움직이는 자들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밤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가져다주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우리는 상상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어둠 속의 존재를 상상하고, 알 수 없는 존재를 만들어 내었다. 때로 이야기는 우리 내부로 향하기도 해서 내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나라는 존재, 내 안의 욕망을 마주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밤에는 이성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기게 되었다.
그 DNA가, 그러한 역사가 나의 핏줄에 남았는지도 모른다.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찾고, 내 안에 감춰진 욕망을 대면하려 애쓰는 모습은 밤의 그것에서 나왔는지 모른다. 설명할 것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밤의 본질은 있는 그대로라기보다, 원하는 그대로의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밤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것들의 절반은 인간의 알 수 없음에서 나온 것들이다.
시간이 지나도 밤이 매력적인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