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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Mar 21. 2020

뭐?! 안 해봤는데~요??

-이런 거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요? - 

-일단 한 번만 먹어보고 못 먹겠으면 먹지 마. 그런데 먹지도 않고 그러는 건 안돼-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조카가 사정이 있어 우리 집에 머무르고 있다. 방학을 보내고 개학이 되면 집으로 간다고 했는데 요놈의 코로나 때문에 이제 두 달 가까이 우리 집에 식객으로 머물고 있다. 


요즘 세상에 드문 상남자다 


-청소기 돌릴 줄 모르는데요?-

-어떻게 정리하는지 모르는데요?-

-청소 집에서 안 하는데요?-


남자가 귀한 처가댁에서 첫아들이다. 손자가 10명이나 되는 장모님에게 첫 번째 손자다. 게다가 처형의 아들 사랑 또한 남다르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도록 제 방 청소해본 적이라고는 없고, 집안일을 도운다는 건 고작 재활용품 분리수거할 때 들고나가는 게 전부란다. 


게다가 이제는 머리가 컸다고 고집을 피운다. 

훈육을 하려 하면 벌써 싫은 표정에 대답도 않고 입을 닫아 버린다. 환장하겠다. 내 자식 같으면 내 맘껏 내 소신껏 교육한다지만 조카라지만 그래도 다른 집 자식이다 내가 참아야지. 곧 개학하면 이제 안녕이다.


이렇게 버텼는데 개학이 점점 늦어진다. 결국 나도 터졌다. 

한참을 버럭버럭 소리 지르며 협박도 하고 달래도 보는데 이놈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대답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버틴다. 버티기는 하지만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마음이 아픈 것인지 계속 흐느낀다. 

안쓰럽기도 하고, 이 방법으론 더 안될 것 같아 방법을 바꿨다. 


-나 기다리는 거 굉장히 잘하거든. 시간도 많고. 넌 내가 물었던 2가지 질문에 네 생각을 말해야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을 거야 버텨봐야 끝나는 건 없어- 


나즈막한 목소리로 협박 반 회유반을 던지고는 나도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같은 방에서 누가 더 많을 참는가 경쟁이 시작되었다. 


일부러 말을 아끼는 경우는 생각보다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 지금 상황처럼 아무리 내가 유리한 상황이어도 타인과의 트러블이 있는 경우엔 더 그렇다. 그래도 상대는 이제 초등학교 6학년 아닌가. 그래도 내가 너보다 군대 가서 개갈굼도 더 당해봤고, 사회에서도 그랬다. 자영업의 험난함과 치사함도 다 경험했는데 설마 너한테 질까 보냐. 사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입을 닫으려 노력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벌써 난 졌는지도 모른다. 다만 여긴 내 홈구장이니까 내게 더 유리할 뿐이었다. 


불쌍한 초등학교 6학년 상꼬마는 백기를 들었다. 

내가 물은 질문에 짧게나마 대답을 했고, 한 번 말이 트이니 묻지도 않았는데 주저리 넋두리도 시작했다. 자기는 혼나고 화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다. 그래서 누가 물어도 다그쳐도 대답하기도 싫고,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다. 그래서 자신에게 시간을 좀 주었으면 좋겠단다. 그러면 혼자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면 대답을 할 수 있단다. 그래 그럴 수 있다고 말해주고 대신 꼭 대답은 하고 끝내야 한다고 약속을 받았다. 


실제로 며칠 후에 또 혼낼 일이 생겼다. 이 녀석 이때는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흐느낀다. 화는 머리끝까지 나는데 저렇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니 일단은 약속대로 하기로 했다. 


- 너 시간 줄테니까 방에 가서 생각하고 나와서 대답해 어서 - 


일단 그 녀석의 동굴로 보내주었지만 언제 나와서 대답을 할지 며칠이 갈지도 몰랐는데 녀석은 불과 3-40분도 지나지 않아 나와서는 상황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말한다. 그래 봐야 혼나고 고칠 것만 잔뜩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빨리 나와서 대답을 하려 했다는 게 기특하기는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내게 부탁한 것은 자기는 정말 모른다는 거다. 청소기를 어디서 가져와서 어떻게 돌리고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는 건지, 방청소는 어떻게 해야 깨끗하게 했다고 하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다는 것다. 함께 온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애는 이제 부르기만 해도 뭐가 필요한지 눈치 100단인데 두 남매가 너무도 다르다. 큰 놈이니까 작은놈만큼은 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작은놈이 너무 잘하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큰 놈에게 무언가를 시킬 때는 구체적으로 지시하기 시작했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가지고 어느 곳을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어떻게 언제까지 마무리 지어라"라고 


중고딩, 대학시절 열심히 해온 6하 원칙을 여기에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지시가 구체적으로 변할수록 큰 놈과의 트러블은 줄었다. 예전처럼 투덜거리긴 해도, 지시한 바는 그래도 지키려고 했고, 가르쳐 주면 곧잘 따라 하기도 한다. 


그래 넌 이제 13살이구나 

난 벌써 네 삶의 세 배가 넘는 시간을 살아왔는데, 너한테 내가 무엇을 그리도 바란 건지 


한 번 더 천천히 가르쳐 주었으면 되었을 것 그랬나 보다. 

니가 나와 같은 공간에서 지난 시간은 이제 겨우 두 달이 되어가는데 나는 네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들을 부정하기만 했나 보다.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시간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천천히 가르쳐야 했나 보다. 


앞으로 좀 더 천천히 기다리마. 네가 어디까지 성장하는데 함께 지켜보자. 


그래도. 우리 "안 해봤는데요??- 요거는 빼자 너 하면 잘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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