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저기요. 혹시 식사하셨어요? 아직 식사 전이시면, 이거... 드세요"
"에? 뭐예요? 이거... 아~ 옥수수예요. 전 옥수수 안 먹어요. 가져가세요. 괜찮아요. "
"아.... 그냥 맛이나 좀 보시라구요. 그럼 여기 두고 갈 테니 심심하면 드세요"
"아니... 안 먹는다니... 까....."
성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성은 벌써 저만치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가다가 이쪽을 흘낏 보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벌써 몇 번째인지.. 저번에는 감자.. 이번에는 옥수수.. 하필이면 다들 성준이 싫어하는 것들만 가지고 온다. 보육원에서 질릴 정도로 먹었던 구황작물... 보육원에서는 무슨 일인지 감자와 옥수수 고구마 같은 것들이 모자라지 않았다.
성준은 달콤한 과자가 먹고 싶었지만, 현실은 감자 고구마 옥수수다. 그나마도 자주 나오는 것이 아니라서 귀했다. 선생님들이 삶아 주시면 동생들과 하나 라도 더 먹고 싶어 허겁지겁 입에 넣고는 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손이 가지 않았다. 질려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동생들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손을 대기 미안해졌다. 볼이 빵빵하도록 입에 넣고도 손은 또 다른 감자를 집으러 나온다. 이상하게 보육원에서는 배가 고팠다. 항상 허기가 지고, 배가 고프고 추웠다.
보육원을 퇴소하고도 감자 고구마 옥수수만 보면 그때 장면이 떠올라서 기분이 우울해진다. 그래서 보육원을 퇴소하고는 한 번도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먹지 않았다. 그런데 저 여인은 자꾸 내게 그런 것만 준다.
김호열 씨 심부름을 하고 거의 이주가 넘게 지났다. 사람들은 비어버린 호열 씨의 집을 돌아가며 쓸고 닦았다. 때때로 그와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만났고, 어딘가 동질감을 느껴서일까? 그리움일까? 자신도 언제고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일까? 그들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크게 다가왔고, 그들과 자신들의 운명이 같은 길을 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자.. 이거 가져가요. 나 감자 고구마 옥수수 이런 거 싫어해"
"에? 아... 몰랐어요.. 그냥.. 한 번 드셔보라구 드린 건데.. 미안해요"
"뭐.. 미안해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예전에 너무 질리도록 먹었어. 그래서 이제는 처다 보기도 싫어서 그래. 그냥 그것 때문이야. 너무 미안해하지는 말고. 그나저나 뭣 때문에 그래?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뭐야? "
"네? 무슨 부탁이요? "
"뭐 나한테 원하게는 게 있으니까. 이런 것 주고, 잘 보이려 하는 거 아냐?"
"그런 거 아니에요. "
"그럼 뭐 나한테 흑심 있어서 그래? 오랜만에 젊은 남자 보니까 막 떨려?"
"에?? 무슨 그런 소리를.. 미안한데.. 그쪽이 그렇게 잘생긴 건 아니거든요. 웃겨... "
"뭐? 내가 봐도 여기 나보다 젊고, 허우대 멀쩡하고 그런 사람도 없구먼 뭘"
"호호호. 그건 맞는데 나는 좀 더 진중한 타입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쪽은 리스트에 없어요"
"그럼 왜? 자꾸 나한테 이것저것 주고 그래? 이유가 없다는 게 말이 돼?"
"저... 어떤 삶을 살아온 거예요? "
"엉? 어떤 삶이라니? 그게 뭔 소리야?"
"아니. 원래 맛있는 거 있으면, 주변 사람들과 나눠 먹고, 어려운 일 있으면 도와주고, 좋은 일 있으면 같이 기뻐하고, 뭐 그런 게 동네 사람들 아니에요? 어릴 때 이런 거 주고받고 안 해 봤어요? 부모님이 바쁘셨나? "
"어이. 어이.. 왜 이런 일에 부모님까지 끌고 들어오고 그래? 그건 반칙이지. "
"아니.. 비난하는 게 아니라. 보통 우리 어릴 때 보면 다들 동네에서 반찬도 나눠먹고, 과일도 나눠 먹고, 다들 그러고 살았으니까. 뭐 지금이야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그쪽도 그 정도는 경험했을 법한 세대 같으니까. 뭐 그런 거지.. 왜 발끈하고 그래요.. "
"흠. 흠.. 나도 다 알아. 그렇게 컸어 나도. 그런데 그런 사람들 보면 아주 염치없는 경우도 많아. 자신의 것도 아닌데 막 빌려서 안 가져오고, 무리한 부탁들도 하고, 경우 없이 집에 찾아와서 가져가고. 엉? 뭐? 내가 그런 것들 모를 거 같아. 그 사람들도 다 자기가 필요한 게 있으니까. 잘 보이려고 약 치는 거지. 뭐 다들 선의로 그러는 줄 알아? 세상이 뭐 그리 아름다운 줄만 아는갑네? 참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네.."
"뭐래~ 뭐 그런 사람이 없지도 않겠지만. 대부분은 아닐걸요? 그냥 이웃이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게 정이니까. 조금 손해 보더라도 나누고 함께하고, 그러다 또 어려운 일 있으면 제 일처럼 나서서 돕고, 다들 그러는 거지. 참. 각박하게도 살아왔나 봐. 그러니까. 깡패짓이나 하지.."
"누가 깡패래? 내가 사람 패는 거 봤어? 엉? "
"누가 봐야 아나요. 뭐 하는 짓이 경우 없고, 예의 없고, 사람들 대할 줄 모르고, 자신의 욕심만 챙기고, 그러려고 물불 안 가리면 그게 건달이고 깡패지. 꼭 사람 때리고 욕하고, 문신해야 깡팬가. "
"아니야. 나. 깡패."
"아님 말구요. 아니면 더 좋지요 뭘.. "
"그나저나. 얼마나 여기 있었어? "
"나요? 음... 꽤 되었나? 얼마나 있었지? 에이... 뭘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그런 걸 궁금해해요.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신파 없는 사연일 거 뻔한데.. 됐어요. 안 할래요."
"뭐... 맘대로 하슈.. 내가 궁금하댔나?"
"아이 뭐야. 그쪽이 물었으면서.. 실없기는."
"흠 암튼.. 난 옥수수 안 먹으니까. 다른 사람들이나 나눠 줘. 앞으로 나한테는 이런 거 안 줘도 돼. 나한테 줄 거면 달콤한 과자나. 아니면 반짝이는 금괴 같은 거 그런 거나 주면 돼. 현금이 제일 좋고. 암튼 나 간다. "
성준의 하루는 이렇다. 별 다른 할 일도 없이 동네를 기웃기웃 거리며, 주민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고. 그들이 텃밭을 가꾸는 것을 구경하고, 날씨가 좋으면, 어디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즐기곤 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래도 먹을거리는 꼬박꼬박 나오고, 돈을 벌 필요도 없었고, 돈을 쓸데도 없었다. 필요한 먹거리는 숲에서 캐오기도 하고, 고기가 먹고 싶은 날에는 덫에 걸린 토끼 같은 작은 짐승들을 찾았다. 별로 할 일이 없어서일까. 주민들은 하는 일 하나하나에 매우 집중해서 일을 한다. 그들도 노동 시간이 길지 않지만, 잡초를 캐고, 돌을 옮기고, 오늘 먹을 과일을 수확하는 모습을 보면, 결코 서두르거나 허투루 하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의 양만 고르고 골라 토마토를 따고, 고추를 딴다. 어쩌다 더 늦게 수확하면 안 될 일이 생기면 마을 잔치가 열린다. 나이가 많은 남자들은 수렵에 익숙한 지 때로는 큼지막한 닭을 잡기도 한다. 그 닭을 손질하는 모습을 직관한 성준은 괜히 이들에게 어설픈 연장은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큼지막 한 닭을 몇 마리 잡고,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큰 가마솥에 삶아 백숙을 한다. 그리고는 저녁이 되자 모두를 불러보아 식사를 함께 한다.
첫 초대는 성준이 거절했다. 그들과 딱히 어울리고 싶지도 않았고, 혼자 있는 게 편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 많은 곳에 가서 좋았던 경험이 하나도 없다. 놀리거나, 놀림받거나, 주먹다짐이거나, 말싸움이 전부였다. 되도록 사람 많은 곳을 피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부득불 성준을 초대해 식사를 함께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먹을지 말지 물어보는 것 외에는 성준에게 별 말을 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도 성준보다 내일 비가 올지, 올해의 작황은 어떨지. 요즘 안개가 조금 옅어진 것은 아닌지. 안개 구역 안에 또 새로운 일들은 없는지 나누는 대화가 더 많았다. 그런 상황이 길어지자 왠지 모르게 성준은 소외당하는 것 같았다.
챙겨줘도 싫고, 그냥 홀로 두는 것도 싫었다.
성준은 참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다.
"고기는 잘 먹네요?"
"뭐.. 옥수수보다는.."
"원래 이렇게 다들 자주 모여요?"
"아니요. 상추고, 고추고 이제 따놓지 않으면 너무 익어버리니까. 다 따놓고, 맘껏 먹어 없애는 거죠. 여기에서 이런 이벤트 말고는 딱히 할 것도 없으니. 이렇게 노는 거예요"
"뭐. 별로 노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음... 생각해 봐요 한 번. 당신이 내일모레 죽을 사람이에요. 침대에 누워서 꼼짝을 하기가 어려워. 말도 하기 힘들고, 어느 자세로 누워도 몸이 아파. 사람이 몸이 아프면 얼마나 생각이 약해지는 줄 알아요?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눈을 감고 고통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면 끙끙 앓아요. 그나마 약기운이라도 잘 들면 버틸 만 한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그 단계를 지나버린 사람들이니.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죠.
그런 사람들이 일도 하고, 밥도 먹고, 밥 먹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를 거야. 입으로 씹을 수 있는 거. 목구멍으로 꿀떡 넘어가는 거. 배가 부르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아마 잘 모를 거예요.. 그래서 우리 한테는 이게 놀이예요. 정말 즐거운 놀이."
"췌.... 뭐.. 그럴 수도 있겠네..."
"많이 먹어요. 그러니까. 참. 내 이름은 남정희예요. 그래도 이름 정도는 부르고 살아야 하니까. 많이 먹어요 성준 씨"
나는 그녀의 이름도 몰랐는데. 그녀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