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가까움 속에서만 관계가 무르익는다고 믿는다. 자주 마주치고, 자주 대화하고, 붙어 있어야 끈끈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을 오래 두고 보면, 정반대의 순간들이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오히려 한 발자국 물러선 자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공간에서 관계가 새롭게 호흡하기 시작한다.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렌즈를 너무 가까이 들이대면 얼굴은 일그러지고, 배경은 산산이 흩어진다. 그러나 몇 걸음 물러서야 인물과 풍경이 함께 어우러지며 또렷하게 잡힌다. 관계 또한 이와 같다. 붙어 있을 때는 놓치던 것들이, 떨어져 있을 때 오히려 선명해진다. 가까움이 따뜻함을 준다면, 거리는 명료함을 준다.
차를 마실 때의 경험도 그 증거다. 방금 끓여낸 차는 혀끝을 데울 뿐, 그 안의 향과 깊이를 가려버린다. 아무리 좋은 잎을 우려도, 뜨거움이 가시기 전에는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뜸을 들인다. 뜨거움과 입술 사이에 공기의 시간을 끼워 넣는 그 순간이 필요하다.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만남과 대화만으로는 오히려 지쳐버린다. 잠시의 공백, 서로를 식히는 시간이 있어야 관계의 향이 드러난다.
음악 또한 쉼표를 통해 완성된다. 쉼표가 없는 음악은 단지 소음일 뿐이다. 때로는 소리가 아닌 침묵이 음악을 아름답게 만든다. 현악기의 선율 사이로 스며드는 정적, 피아노 건반 위에서 잠시 멈춘 손끝, 그 짧은 공백이 있어야 청자는 감정을 고이 쌓아 올린다. 관계에서의 거리는 바로 그 쉼표와 닮아 있다. 말과 말 사이의 침묵, 만남과 만남 사이의 공백이 있어야 마음은 울림을 얻는다. 쉼이 없는 친밀은 결국 소진이 되고, 거리를 둔 친밀은 여운이 된다.
공항의 풍경은 그 극적인 예시다. 출국장의 유리벽 너머로 손을 흔드는 이별의 순간,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갈라져 있지만 그 사이에 묘한 긴장과 설렘이 차오른다. 공항의 거리는 단순히 떨어져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 거리는 곧 그리움의 크기가 되고, 다시 만날 날을 향한 기대가 된다. 며칠, 몇 달, 혹은 몇 해 뒤의 재회에서, 그간의 거리가 차곡차곡 쌓아올린 그리움이 포옹 속에서 무너져 내린다. 결국 떨어져 있었기에 가능한 충만함이다. 만약 늘 곁에 있었다면 그 재회의 순간은 그토록 벅차지 않았을 것이다.
지하철 손잡이 간격에서도 같은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너무 가까우면 어깨가 부딪혀 불편하고, 너무 멀면 낯설어 손을 뻗기조차 어렵다. 적당한 간격이 유지될 때, 사람들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할 땐 시선을 나누거나 말을 붙일 수 있다. 작은 틈새가 불편을 줄이고, 동시에 소통의 가능성을 연다. 사람 사이의 거리는 단순한 떨어짐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각도를 만들어주는 장치다.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자. 초점은 언제나 거리를 필요로 한다. 너무 다가가면 초점은 흐려지고, 결국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다. 한 발자국 물러서야만 전체가 보이고, 한 사람의 얼굴이 온전히 제 모습을 찾는다. 우리는 종종 너무 가까이 들이대며 상대를 알려고 한다. 그러나 가까움 속에서는 오히려 상대가 희미해진다. 거리가야말로 상대의 윤곽을 밝혀주는 조명이다.
이렇듯 삶은 늘 모순처럼 보인다. 사랑하는 이와는 가까이 있고 싶지만, 진정으로 오래 가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거리는 곧 관계의 호흡이다. 가까움은 불씨를 지피지만, 거리는 불꽃이 꺼지지 않게 바람을 조율한다. 쉼 없이 붙어 있으면 금세 산소가 고갈되지만, 간격이 유지될 때 불꽃은 길게 살아남는다.
나는 종종 내 곁의 사람들을 떠올린다. 어느 순간에는 가까이 있는 것이 힘들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적당한 간격 속에서 오히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내가 보지 못했던 표정과 말투, 그 사람의 고유한 리듬이 보였다. 거리는 단절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통로였다.
관계는 따뜻함과 명료함 사이에서 숨 쉬며 살아간다. 가까움은 온기를 주고, 거리는 투명함을 준다. 우리는 그 두 가지를 번갈아 가며 살아야 한다.
때로는 손을 맞잡아야 하고, 때로는 손을 놓아야 한다.
붙어 있을 때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 선명히 보이는 얼굴이 있다.
거리를 둔다고 해서 멀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관계는 더 깊어지고, 더 오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