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오래전부터 ‘고(苦)’의 뿌리를 집착이라 말해왔다. 집착이란 단지 물질적 소유만이 아니다. 오히려 더 무겁고 더 은밀한 것은 자신의 신념을 움켜쥐는 집착이다.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신념을 세우고, 믿음을 굳히며, 언어를 벽돌 삼아 자기만의 세계를 쌓는다. 그러나 그 벽은 곧 상대방과 나를 갈라놓는 장벽이 된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말은 더 이상 다리를 놓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가두는 철조망이 된다. 상대는 내 신념의 언어를 모른다. 나는 그의 믿음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같은 말을 하면서도 다른 뜻을 읽고, 같은 침묵 속에서도 서로 다른 고통을 느낀다. 언어가 다리가 아니라, 고통의 굴레가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신념을 꺾고 상대와 함께 살아야 할까, 아니면 고독을 감수하더라도 믿음을 지켜야 할까.
불교는 “모든 법은 무상하다”라 가르친다. 믿음조차 무상하다면,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는 얼마나 덧없는가.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나의 신념”을 생존의 기둥으로 착각한다. 그것이 무너지면 내가 사라질 것이라 두려워한다. 그래서 사람은 신념을 위해 타인을 밀어내고, 때로는 홀로 살기를 선택한다.
홀로의 삶은 고독을 전제로 하지만, 그 고독이 곧 자유일 수도 있다. 타인의 기대와 요구에서 벗어난 순수한 자율. 그러나 동시에 그 자유는 깊은 공허를 동반한다. 결국 인간은 신념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유배 보내는 셈이다.
믿음은 단단한 바위일까, 아니면 흐르는 물일까. 우리는 흔히 믿음을 고정된 형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는 그것을 연기(緣起)의 산물이라 본다. 믿음은 혼자 솟아난 것이 아니다. 환경, 관계, 시간, 언어가 얽히며 잠시 머무는 모양일 뿐이다. 그러니 믿음은 실체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과정을 절대화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믿는다.” 이 말 속에는 이미 집착의 냄새가 묻어 있다. 믿음을 ‘나’와 동일시하는 순간, 그 믿음이 흔들리면 ‘나’도 무너질 것 같아 두려워진다. 그래서 대화는 싸움이 되고, 싸움은 곧 고통이 된다.
만약 내가 내 신념을 버린다면, 나는 누가 되는가. 무신념의 인간, 무색무취의 존재일까? 아니다. 신념을 버린다는 것은 공허 속으로 떨어지는 일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으로 열리는 일이다. 물이 그릇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듯, 나 또한 순간순간의 인연에 따라 믿음을 달리 세울 수 있다. 그것은 배신이 아니라 유연함이며, 고통을 줄이는 길이다.
물론 인간은 신념 없이 살 수 없다. 최소한의 신념은 삶을 지탱하는 의자와 같다. 문제는 그 의자에 못을 박아 고정시키느냐, 아니면 언제든 옮길 수 있느냐이다. 불교는 후자를 택하라 말한다. 집착 없는 믿음, 유연한 신념. 그것이 곧 ‘중도’의 길이다.
우리가 고통을 겪는 이유는, 신념 자체보다 그것을 언어로 고집하기 때문이다. 말은 본래 지시의 도구인데, 어느새 존재의 감옥이 된다. “옳다”와 “그르다”는 판단이 신념을 강화하고, “나는 너와 다르다”는 선언이 대화를 절단낸다.
하지만 말은 본래 부정확하다. 시인의 말처럼, 단어는 사물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가 실체를 대변하지 못하듯, 언어도 신념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 위에 성을 쌓고, 언어의 돌로 상대방을 내리친다. 그 결과, 대화는 상처로 남는다.
불교는 이를 ‘망상(妄想)’이라 한다. 언어와 개념에 붙잡혀 본질을 보지 못하는 상태. 그렇다면 해답은 단순하다. 말 너머를 보는 것이다. 말에 집착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드러나는 타인의 고통을 알아차리는 것. 그때서야 진정한 대화가 시작된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나는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홀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신념을 내려놓고 함께 살아갈 것인가. 이 물음은 단순히 종교적 고민을 넘어, 현대인의 가장 보편적인 딜레마다.
홀로 선 사람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종종 ‘관계의 부재’라는 또 다른 고통을 낳는다. 함께 선 사람은 따뜻하다. 그러나 그 따뜻함은 ‘자기 상실’이라는 희생을 요구한다. 우리는 늘 그 사이에서 흔들린다.
불교는 이 갈등을 “나와 너, 옳음과 그름”이라는 이분법 자체를 놓아버리라 말한다. 홀로와 함께, 신념과 포기 ― 이 모든 것은 실은 허상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고통을 줄이는 길을 택하느냐이다.
우리는 모두 집착을 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은 믿음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믿는 것을 ‘절대’로 만들지 않는 연습이다. 믿음을 절대화하는 순간, 대화는 전쟁이 되고, 관계는 감옥이 된다. 반대로 믿음을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것으로 바라보면, 언어는 다시 다리가 된다.
나의 신념을 잠시 내려놓을 때, 타인의 말이 귀에 들어온다. 나의 믿음에 공백이 생길 때, 그 틈으로 타인의 세계가 흘러들어온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조금 덜 고통스럽게 살아갈 수 있다.
신념과 믿음은 인간이 사는 힘이다. 그러나 그 힘이 집착으로 굳을 때, 그것은 곧 고통의 씨앗이 된다. 불교가 말하는 집착의 문제는 결국 자기 세계에만 머무는 완고함이다. 고통을 줄이는 길은 신념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고, 신념을 상대화하는 데 있다.
나는 홀로일 수도 있고, 함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집착을 덜어내고, 언어를 다리로 만들 수 있느냐이다. 믿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모양을 달리할 뿐이다. 흐르는 물처럼, 머무르되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고통을 덜고 삶을 깊게 만드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