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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와 미안하다 사이, 아직도

by 성준

나이가 들수록 ‘미안하다’는 말은 혀끝에서 미끄러져 떨어지지 못한 채, 체면이라는 굳은 껍질에 걸려 오래 울린다. 젊을 때는 감정이 튀면 말도 튀었다. “미안.” 한 음절 반짝 던져도, 친구는 금세 웃으며 말의 반짝임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해가 깊어질수록 말은 무게를 얻고, 무게는 관성을 낳는다. 한 번 굳은 침묵은 계속 침묵하고, 끝내 사과를 밀어내며 자리를 지킨다. 나는 그 침묵의 기술을 능숙하게 배웠고, 때로는 그 능숙함이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든다는 사실도—늦게서야—알았다.


문화는 우리를 조용히 조각한다. 한국에서 ‘미안합니다’는 가끔 예의가 아니라 위계의 역학으로 읽힌다.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낮아지고, 받아주는 사람은 높아진다는 낡은 거래의 감각.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앳된 날들엔 체면보다 관계의 온기가 먼저였는데, 어느새 체면이 관계의 온기를 덮는 담요가 되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곧 나를 내어주는 일처럼 느껴질 때, 혀는 굳고 어깨는 솟는다. 그 자세를 의연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실은 두려움이 만든 방어일 때가 더 많다.

물리학의 은유를 빌리자면, 사과라는 파동은 도플러 효과를 겪는다. 가까울 때는 높은 음으로 또렷이 들리지만, 멀어질수록 낮고 퍼져 왜곡된다. 젊을 때의 나는 감정과 말 사이의 거리—즉 매질—가 짧았다. 미안함이라는 진동이 곧장 입술에 닿아 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더해질수록 그 사이에는 자존심, 직함, 실패의 기억, 억울함의 퇴적층이 켜켜이 끼어든다. 파동은 그 층들을 통과하며 에너지를 잃고, 막상 소리가 될 즈음엔 이미 흐릿하고 늦다.

엔트로피 역시 우리의 사과를 어렵게 만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체계는 무질서를 향해 기운다.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어린 시절엔 사과 한 번으로도 금세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어른의 관계는 변수가 많다. 이해관계의 끈, 책임의 경계, 해석의 차이, 기억의 편파성. 한 번의 미안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우리는 계산한다. “말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렇게 엔트로피는 말의 출구를 막고, 우리는 무질서의 냉기에 스스로를 더 깊이 밀어넣는다.

장면 하나. 퇴근이 늦어진 밤, 부엌등만 켜진 집. 식탁 위에 굳은 찌개와 미지근해진 공기가 놓여 있다. 아이는 이미 잠들었고, 배우자는 말없이 설거지를 마저 한다. “미안해” 한 마디면 될 것 같아 입술이 간질거리지만, 나는 변명부터 세운다. “회의가 길어졌어.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어.” 그 말의 뒤편에서 진짜 말—오늘 당신을 혼자 두어 미안하다는 말—은 도착하지 못한다. 나는 체면의 교통정리를 하느라, 관계의 신호를 보지 못한다. 다음날 아침, 설거지통에 찬물이 가득하고, 우리는 각자의 온도로 서로를 해동한다. 해동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을 내가 더 길게 만든 셈이다.

장면 둘. 엘리베이터 안에서 같은 층 이웃을 만난다. 지난주에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는 걸, 집으로 돌아온 뒤에야 떠올렸다. 오늘은 먼저 눈을 마주치고 “지난번에 제가 못 봤어요, 실례했습니다.”라고 말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금속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은, 마치 내가 먼저 낮아지면 내 삶 전체가 낮아지는 것처럼 경직된다. 웃음이 늦게 핀 꽃처럼 어색하다. 우리는 일곱 층의 짧은 거리를 침묵으로 오른다. 층마다 버튼이 불을 밝히는 동안, 내 자존심도 층층이 굳는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사과의 타이밍은 습기처럼 증발한다.

동서고금의 문장들을 빌려내 보자. 공자는 “과실을 고치지 않는 것이 과실”이라 했고,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다. 나는 때로 사과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내가 나에게 도착하지 못한 채 미끄러지는 느낌을 받는다. 쇼펜하우어가 자존심을 “가장 값비싼 보물”이라 불렀다면, 우리는 그 보물을 지키려다 관계를 잃는다. 니체는 “나는 내 진실을 감히 말하는 자”라 일갈했지만, 나는 감히의 자리에서 감각의 자리로 물러난다. 무엇이 옳은지 알지만, 무엇이 안전한지를 먼저 고른다. 안전은 대개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배웠다. 사과는 패배의 신호가 아니라, 관계를 재가동하는 스위치라는 것을. “미안하다”는 말은 잃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사이에 새로운 질서를 합의하는 일이다. 내 잘못을 통째로 넘겨주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오만의 지분을 줄이고, 너의 상처가 들어설 공간을 마련하는 일. 그렇게 스위치가 들어가면, 차가운 엔트로피는 잠시 되돌아간다. 방 안의 공기는 순환하고, 오래 닫혀 있던 창문은 삐걱이며 열린다. 나의 체면은 조금 헐어지지만, 관계의 숨은 조금 더 깊어진다. 무엇이 더 오래 갈까. 나는 요즘에서야 그 질문의 답을 묻는다.

사과의 말에는 물리와 윤리가 동시에 깃든다. 말은 진동이고, 진동은 매질을 타고 간다. 그래서 미안의 파동이 멀리 가려면, 우리의 매질—태도와 습관—이 덜 탁해야 한다. 나는 내 매질을 닦아본다. 변명부터 올라오는 습관을 늦추고, 설명보다 인정이 먼저 오게 연습한다. “그래, 내 실수였다.” 문장은 짧고, 그 짧음이 강하다. 짧은 문장은 궤도를 수정한다. 화법의 궤도, 관계의 궤도, 그리고 내가 나에게 도착해가는 궤도. 그 궤도가 조금씩 수렴할 때, 미안이라는 신호는 더 선명해진다.

어느 오후, 오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난번 자리에서 내가 무심히 던진 농담이 마음에 남았다고. 메시지를 읽고 한참을 멈췄다. 첫 손가락이 고른 문장은 “그때 분위기가 그랬잖아”였다. 두 번째 문장은 “내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어”였다. 세 번째 문장이 되어서야 “미안하다”가 등장했다. 그리고 배웠다. 의도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위로는, 상대의 고통을 내 문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그때 내가 경솔했다. 네가 상처받았다는 말을 듣고 보니 그때의 표정들이 새로 보인다. 미안하다.” 이 문장을 보낸 뒤, 며칠 간 끊겼던 통화가 다시 울렸다.

우리는 왜 나이가 들수록 사과가 어려운가. 나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해본다. 첫째, 체면이 자아와 겹쳐졌기 때문이다. 체면을 잃는 것이 곧 나를 잃는 일처럼 느껴진다. 둘째, 실패의 기억이 판례처럼 쌓였기 때문이다. 한 번 사과해도 달라지지 않았던 장면들이 마음속 법전에 등재되어 있다. 셋째, 시간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젊을 때의 시간은 수초 단위로 흘렀고, 그래서 사과의 타이밍도 수초 안에 있었다. 그러나 어른의 시간은 하루, 한 달, 몇 해로 묶여 흐른다. 타이밍은 그 안에서 쉬이 사라진다. 놓친 타이밍은 설득보다 용기가 더 필요하다. 그래서 더 망설인다.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첫째, 사과를 설계하지 말 것. 완벽한 문장을 고르려다 밤이 샌다. 둘째, 설명을 절제할 것. 설명은 언제나 변명의 그림자를 데리고 온다. 셋째, 구체를 넣을 것. “그때 당신의 말 위에 내 말을 겹쳐서 미안하다.” “메시지를 늦게 읽고도 답을 미뤄 미안하다.” 명확한 지점은 명확한 회복을 부른다. 넷째, 복구의 행동을 붙일 것. “오늘은 내가 장을 보고, 아이 유치원 하원을 맡을게.” 말의 진정성은 손발에서 완성된다.

언젠가 마지막 인사를 상상해본다. 사랑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사랑이 관계의 시작이라면, 미안은 관계의 유지와 복구를 책임지는 기술이다. 기술은 연습을 먹고 자란다. 나는 오늘도 조금 더 서툰 연습을 한다. 불편함이 목까지 차오를 때, 변명보다 미안이 먼저 나오도록. 체면이 바싹 마를 때, 인간성이 먼저 젖을 수 있도록. 그렇게 나의 파동을 다시 가깝게, 너의 귀에 닿게, 우리 사이의 공기를 맑히는 쪽으로 보낸다.

나이가 들수록 미안하다는 말은 더 어려워지지만, 그래서 더 귀하다. 늦게 피는 꽃이 향이 오래 가듯, 늦게 나온 미안은 오래 남는다. 내가 잃는 것은 체면의 얇은 막일 뿐이고, 내가 얻는 것은 관계의 깊은 숨이다. 세상은 늘 엔트로피로 흩어지지만, 우리는 때때로 미안이라는 작은 질서를 세울 수 있다. 그 질서 속에서 삶은 덜 차갑고, 사랑은 덜 쉽게 닳는다. 그러니 오늘 밤, 부엌등이 마지막으로 꺼지기 전에—먼저 말하자. 미안하다고. 그 한 문장이 방 안의 공기와 내 마음과 우리의 내일을, 아주 조금이라도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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