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순간에도 쉽게 “안 돼”라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에겐 너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위험한 행동을 막거나, 잘못된 길을 돌려세우는 짧은 금지의 언어. 그러나 내게 그 두 글자는 늘 혀끝에서 무겁게 굴러 떨어지다, 다시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버린다. 그 말에는 오래된 그림자가 겹쳐 있기 때문이다.
내 동생은 어린 나이에 병을 얻었다. 병원 이름표가 달린 팔찌를 차고, 차가운 주사약과 바늘로 시간을 견디는 아이였다. 식탁 옆에는 늘 주사기와 약병이 놓여 있었고, 냉장고 한 켠은 약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옆에는 사용하고 버린 주사침이 한 움큼씩 쌓여 있었고, 엄마는 그것들을 손수건에 감싸 조심스럽게 버렸다. 동생의 팔뚝에는 늘 바늘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 작은 몸은 언제나 피곤과 싸우며 흔들렸다.
우리 집은 늘 긴장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조심해도, 아무리 절제해도, 언제 또 위기가 닥칠지 몰랐다. “그건 먹으면 안 돼.” “조금만 참아.” “오늘은 무리하면 안 된다.” 부모님의 목소리는 늘 경계의 음성으로 떨렸고, 어린 나도 그 리듬에 갇혀 살았다. 나는 자연스레 배웠다. 세상은 함부로 웃어서는 안 되는 곳, 작은 실수 하나로 모든 게 무너지는 곳이라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정작 그 말을 내뱉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동생이 초콜릿을 바라보면, 내가 대신 “안 돼”라고 말하는 순간 그 작은 세상이 더 좁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침묵을 택했다. 차라리 동생이 몰래 사탕을 입에 넣는 걸 보며 눈을 감아버렸다. 금지를 내뱉는 순간, 나는 그 아이의 숨결을 더 옥죄는 공범이 될 것 같았으니까.
동생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끝내 그 아이를 지켜내지 못한 채, 마지막에 마주한 건 영안실의 차가운 냉장고였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는 짧았지만, 그 차가움은 아직도 내 귀 안에서 울린다. 거기에 담긴 건 내 동생의 몸뿐 아니라, 우리가 지켜내려 했던 모든 조심과 절제, 그리고 그것이 끝내 아무것도 막아내지 못했다는 절망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안 된다”라는 말의 무력함을 몸으로 기억하게 됐다. 금지와 절제, 규칙과 울타리. 우리는 그것들을 붙들고 살았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게 “안 돼”라고 말하려 할 때마다, 그 차갑고 금속성 냄새가 되살아난다. 나는 또 다른 가능성을 내 손으로 묻어버리는 것 같아, 끝내 말을 삼켜버린다.
아이를 키우면서 이 갈등은 더 선명해졌다. 놀이터에서 아이가 높은 곳에 오를 때, 친구들과 뛰놀다 위험한 순간이 닥칠 때, 나는 본능적으로 “안 돼”라고 외쳐야 했지만, 그 말은 혀끝에서 얼어붙는다. 대신 나는 우회한다. “조심해, 다칠 수 있어.” “차라리 이쪽이 더 좋지 않을까?” 아이가 뭔가를 하고 싶어 하면 나는 허용 쪽으로 기울어 버린다. 상처가 나더라도, 차라리 그 안에서 배우게 하고 싶다. 금지와 절제가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한다는 걸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 태도를 무책임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어른이라면, 부모라면 분명히 단호히 금지해야 할 순간이 있다. 그러나 내겐 그 단어가 너무 무겁다. 그것은 단순한 훈육의 언어가 아니라, 내 동생의 삶을 조여왔던 모든 금지의 기억이자, 영안실의 냉기를 불러오는 트라우마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절제가 없으면 무너지는 것이 있고, 규칙이 없으면 삶이 더 빨리 망가진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안다. 지나친 금지가 삶의 색을 앗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내 동생은 결국 살아남지 못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조차 끝없는 금지 속에서 웃음을 잃어야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너무 오래 곁에서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답을 찾지 못한다. ‘안 된다’라는 말은 정말로 삶을 지켜주는 말일까, 아니면 삶의 빛깔을 빼앗는 말일까. 나는 매번 두 목소리 사이에서 흔들린다. 한쪽은 말한다. 단호해야 한다, 금지해야 한다. 다른 한쪽은 속삭인다. 지금을 놓치지 말라고, 아이의 손에서 무언가를 빼앗지 말라고.
결국 나는 불완전한 길을 택한다. 아이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하고 싶다면, 내가 옆에 있을게.”
이 말은 불완전하다. 금지를 대신할 만큼 단호하지 못하고, 허용을 대신할 만큼 무책임하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의 나다. 영안실의 냉기를 삼켜본 사람으로서, 그 차가움을 내 아이의 등에만큼은 덮어씌우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서.
나는 믿는다. 언젠가 이 불완전한 언어가, 동생이 잃어버린 시간과 내 아이의 살아 있는 시간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거라고. 그 다리는 삐걱거리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지만, 나는 끝내 그 위를 걸어야 한다. 동생이 끝내 건너지 못한 시간을 내가 대신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서툴게 중얼거린다.
“안 돼” 대신, 조금 더 길고 느린 문장들을.
그 문장들은 확신이 없고, 나조차 흔들리지만, 적어도 아이에게는 세상을 닫는 말이 아니라 열어두는 말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여전히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 속에서도 오늘을 붙잡는 것이 내가 배운 유일한 생존 방식이다. 그것은 내 동생이 내게 남겨준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