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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의 숭고함과 거울 속의 어색함

by 성준

세상은 매일같이 눈물과 온기로 덧칠된 장면들을 우리에게 내민다. 드라마 속의 대사, 광고 속 한 컷, 누군가의 SNS에 올라온 사진 한 장조차도 인간의 숭고함을 증명하듯 반짝인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여 몸을 내던지고, 연인이 서로의 손을 끝끝내 놓지 않으며, 친구가 벼랑 끝에서 친구를 붙잡는 순간들. 나는 그 장면들 앞에서 속절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스스로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은 인간이라는 종이 여전히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감동이 가라앉고, 화면이 꺼지고, 방 안의 정적이 다시 나를 감싸는 순간, 낯선 자책이 찾아온다. 왜 나는 현실 속에서 저토록 빛나지 못할까. 왜 나는 배우자에게, 아이에게, 부모에게, 그렇게 눈부신 사랑의 몸짓을 건네지 못할까. 왜 나만 다른 것처럼 느껴질까.


감동과 자책은 늘 같은 몸에 실려 찾아온다. 눈물은 진실하지만, 그 눈물이 마른 자리에서 솟구치는 자기혐오도 진실이다. 나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못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아이의 재잘거림을 건성으로 흘려보내던 나의 표정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아내가 건넨 말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습관처럼 고개만 끄덕였던 내 모습이 떠올라,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인다. 미디어 속의 숭고한 인간과 내 안의 비루한 인간 사이에서 나는 늘 낯선 불협화음을 듣는다.


사실 우리가 마주하는 아름다움은 대부분 연출된 장면이다. 카메라의 초점은 언제나 가장 극적인 순간을 향하고, 편집자의 손길은 그 순간을 가장 눈부시게 가공한다. 우리는 철저히 선택되고 연마된 ‘편집된 사랑’을 소비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대본 없는 즉흥극이다. 아내와의 대화는 늘 예상치 못한 곳으로 미끄러지고, 아이와의 대화는 산만한 변주로 흐른다. 우리는 연습할 틈도 없이 곧바로 무대 위에 오르는 배우들이다. 그러니 당연히 어색하고 버벅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버벅거리는 모습을, 완벽히 편집된 장면과 나란히 세워놓고 비교한다. 그리고 결론은 늘 같다. 나는 다르다. 나는 못났다.


그러나 어쩌면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왜 나는 다를까”가 아니라, “나는 왜 인간일까”라고. 인간은 본디 불완전하다. 사랑을 품지만, 피곤과 짜증이 먼저 튀어나온다. 배려를 알고 있지만, 자기 보존의 본능 앞에서 주저앉는다. 배우자의 얼굴을 보며 위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심코 리모컨을 먼저 집어 들고, 아이의 눈빛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크롤을 내리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우리는 언제나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인간의 초상이 있다.


이 모순이 낳는 감정이 바로 그 낯섦이다. 아름다움에 눈물 흘리면서도, 곧바로 스스로를 질책하는 이상한 이중주. 그것은 부끄러움에서 오고, 동시에 동경에서 온다.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과 그렇게 되지 못하는 현실이 충돌할 때, 그 불꽃에서 낯선 감정이 피어난다. 심리학은 그것을 인지 부조화라 부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인간의 불안이라 부르고 싶다. 그러나 이 불안은 우리를 갉아먹는 동시에, 우리가 여전히 사랑을 갈망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감동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내 안의 불씨가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 불씨를 어떻게 생활의 언어로 번역해낼 수 있느냐일 것이다.


스크린 속 타인은 언제나 절정의 순간에 머무른다. 무릎 꿇고 반지를 내미는 찰나,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하는 찰나, 병상에서 마지막까지 곁을 지키는 찰나.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 절정과 절정 사이를 가득 메운 지루하고도 무거운 일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냉장고를 열고 반찬을 데우는 일, 분리수거 날을 맞춰 쓰레기를 버리는 일, 전기세 고지서를 납부하는 일. 사랑은 거창한 드라마의 장면보다, 이런 사소한 일들 속에서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편집된 장면을 절대 기준 삼아, 우리의 날것을 깎아내린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만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다르다고. 미디어가 보여주는 세계와 내가 살아내는 세계가 애초에 같을 수 없다고. 이상은 빛나지만, 현실은 무겁다. 그러나 무겁기 때문에, 그것은 진짜다. 우리는 완벽하게 사랑할 수 없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오히려 더 인간다운 사랑이 시작된다. 레비나스가 말했듯, 타인은 언제나 나를 초과하고, 나는 타인을 온전히 품을 수 없다. 그렇기에 더듬거리는 몸짓으로라도, 작은 손길로라도, 나는 여전히 사랑을 시도한다.


나는 미디어 속의 장면처럼 살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서툴게, 무심하게, 그러나 분명 내 방식대로 사랑한다. 아내와 다투고 돌아서면서도 속으로는 미안함을 느끼고, 아이의 이야기를 놓쳤다가도 다시 “오늘은 어땠어?”라고 묻는다. 오랜만에 부모님이 떠올라 한밤중에 전화를 거는 일도 그렇다. 이런 사소한 틈에서 사랑은 숨 쉬고 있다. 그것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이어진다.


결국 “왜 나만 다를까”라는 물음은, 나의 결핍을 고발하는 대신, 나의 조건을 드러내는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르다. 그러나 다르기에 인간이다. 나는 눈부시게 편집된 순간 앞에서 눈물 흘리고, 비루한 현실 속에서는 버벅거리며 살아간다. 그 모순이 나를 부끄럽게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살아있게 한다.


나는 오늘도 감동을 느끼고, 자책을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 낯선 감정은 내 어깨를 짓누르지만, 동시에 나를 더 인간답게 만든다. 나는 다르지만, 다르기에 여전히 사랑을 꿈꾸고, 다르기에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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