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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마찰에 막히고, 이야기는 관성에 달린다

by 성준


술집, 늦은 밤. 둥근 조명 아래 테이블엔 맥주잔과 소주잔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이과생과 문과생, 둘은 이미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 너 글 왜 안 써? 너 맨날 글쓴다더니 요즘 조용하던데?” 이과생이 소주잔을 비우며 물었다.

문과생이 헛웃음을 지었다. “글이 잘 안 나와. 며칠 쉬었더니 다시 쓰기가 너무 힘들어. 그냥 화면만 켜면 멍해져.”


“그건 당연하지. 마찰력이라는 게 있거든.” 이과생이 진지하게 말했다. “물체가 움직이지 않을 때, 그걸 움직이게 하려면 엄청난 힘이 들어. 네가 지금 겪는 게 그거야. 커서가 깜빡이고 있는데 손가락이 안 움직이지? 그게 바로 눈에 안 보이는 마찰력이지.”


문과생은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비꼬듯 말했다. “아니 술집 와서도 물리학 강의야? 근데 맞는 말 같네. 진짜 시작이 너무 힘들어.”


이과생은 잔을 다시 채우며 씩 웃었다.


“그리고 말이야, 사람마다 마찰계수가 달라. 누구는 글을 술술 쓰고, 누구는 한 줄 쓰는 데 한 시간 걸려. 이게 바로 마찰계수 차이야. 너는 좀 높은 거지.”

“야, 그러면 나는 글쓰기용 사포야? 거친 표면이냐고?” 문과생이 툭 내뱉자,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있잖아.” 이과생이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을 이어갔다. “자꾸 쓰다 보면 표면이 닳아. 그래서 점점 미끄럽게 글이 써지는 거야. 결국 마찰계수가 낮아지는 거지.”


문과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꾸준히 쓰라는 말이 그냥 잔소리가 아니었구나. 몸이 길들여지면서 쓰는 게 쉬워지는 거네.”


잔이 몇 순배 돌자, 대화는 점점 더 가벼워졌다.


문과생이 갑자기 외쳤다. “근데 있잖아, 신기하게도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오히려 멈추기가 싫을 때가 있어. 마치 손가락이 저 혼자 달리는 것처럼.”


“그게 바로 관성이야, 이 멍청아!” 이과생이 웃으며 소리쳤다. “정지한 물체는 계속 쉬려고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고 하지. 글도 그래. 네가 딱 시작하면, 글은 알아서 줄줄 흘러나와. 그러니까 문제는 첫 문장을 쓰느냐 마느냐야.”


문과생은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관성 때문에 술도 계속 마시는 거 아냐?”


“야, 그건 핑계고. 네가 술을 좋아하는 거지.” 이과생이 받아쳤다. 둘은 또 한 번 폭소를 터뜨렸다.

시간이 흐르자, 술기운이 점점 대화에 농담과 철학을 섞기 시작했다.


“근데 말이야.” 문과생이 슬쩍 진지하게 돌아왔다. “내가 매일 세 줄이라도 쓰면, 진짜 나중에 뭐가 달라질까?”


이과생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말했다. “야, 눈덩이 봤지? 작은 거라도 언덕에서 굴리면 점점 커져. 그게 스노우볼 효과야. 글도 똑같아. 오늘은 세 줄, 내일은 다섯 줄, 그게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책 한 권이 되는 거지. 네 글도 눈덩이처럼 불어나.”


문과생은 소주잔을 빙글 돌리며 웃었다.


“아… 결국 내 글도 굴리면 커진다는 거네. 문제는 내가 맨날 언덕 위에 눈덩이를 안 올려놓는다는 거지.”


“그러니까, 시작하라고. 언덕 위에 눈덩이만 올려놔도 돼. 나머지는 시간과 관성이 알아서 해줄 거야.” 이과생이 단호하게 말했다.


술집은 이미 시끄럽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들의 대화는 농담인지 강의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있었다. 문과생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하얀 문서 위 첫 문장이 서서히 써지고 있었다는 것.


“야, 결국 글쓰기란 건 물리학이네. 마찰력에 막히고, 마찰계수는 사람마다 다르고, 관성이 붙으면 글이 술술 나오고, 꾸준히 하면 눈덩이처럼 커진다.” 문과생이 정리하듯 말했다.


이과생은 잔을 들며 웃었다. “그렇지. 글쓰기의 법칙은 이미 뉴턴이 다 설명해놨다니까.”

둘은 마지막 잔을 부딪치며, 허세 섞인 웃음을 남겼다. 문과생의 눈빛은 살짝 반짝였다. 마치 내일 아침, 숙취를 견디면서도 첫 문장을 적어낼 결심을 한 사람의 눈빛처럼.


그리고 술자리는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문과생의 노트북 속에는, 비록 허술하고 취기에 젖은 문장이었지만, 어쩐지 자기 힘으로 굴리기 시작한 작은 눈덩이가 하나 굴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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