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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Feb 28. 2016

02. 인생은 ______ 상자와 같다.

초콜릿이든, 남자든,  아직 상자 안에 많이 남아있다.

신체 건장한 여성인 나의 지나온 20대는, '몸과 마음을 다해 열렬히 사랑하던 때.'정도로 요약된다. 자랑스럽진 않고.


나이가 들어가며 그럴 일은 없어졌으나 과거의 남자들 중 몇몇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 나의 죄, 나의 영혼'이 되어 내 이성과 정신줄을  갉아먹고는 나를 암흑 구덩이로 착실히 떨어트렸단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겠다.


어느 순간, 그와 나는 너무 다르단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미 많은 시간과 마음을 나눈 그와 헤어질 용기는 없다. 어쩔 수 없이, 관계는 엉망진창이 되고 종국에는 이별한다.(차인다.)


그가 내 인생에서 순식간에 소멸되면서 ‘나란 인간이 과연 존재할 가치가 있을까’ 같은 한심스러운 의심이 싹을 틔우고,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얼토당토않은(꼴에 사뭇 진지한) 결론까지 도달하는 과정 역시 건너뛰면 섭하던 때가 분명 있었다.

지금의 나에겐 결단코 발생할리 없는 이별 후 통증.


두 번 다 그 나락으로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다음의 교훈을 잊지 않으려 애쓰던 때가 분명 있었다.

1. 앞뒤 안가리는 사랑에는 가차 없이 혹독한 대가가 따른다.

2. 잘해준 일에는 후회가 없다. 못해준 것들만 찌꺼기로 남아 질척 질척 내 삶을 과거로 끌어당긴다. 내 옆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잘해주고 보자.

3. 그 사람의 부재로 살아갈 이유조차 잃었던 난데(불효자식) 결국엔 떠올리기도 싫어지는 시점이 분명 온다. (그를 떠올리기 싫다기 보단, 찌질했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4. 헤어진 직후에는 최선을 다하지 못한 일들을 떠올리며 후회하지만, 그 정도만이 당시의 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음을 깨닫는 순간도 온다. 그저 나의 최선이 그가 바라는 최선의 모습과 달랐을 뿐. 몇 번을 다시 해도 그게 나의 최선이고, 그것이 그의 최선이다.

5. 그는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빛나고 멋있는 인간으로 거듭나고, 내가 아무리 힘들고 외로운 몰골이 되더라도 그 사람이 알바가 아니지. 그 사람은 더 이상 어떠한 모습의 나도 보고 싶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기에 미래의 그 어떤 모습의 나도 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무엇을 잡을지 아무도 모른다.

여태껏 집어삼킨 휘향 찬란한 껍질에 싸여있던  맛없는 초콜릿들^.^

그러나 다행히도,-아니, 계속 집어야 할 것이 남아있단 사실이, 선택할 것 투성이인 인생이, 누군가에겐 불행일 수도-상자 안이 텅 비는 일은 없다.

다양한 모양의, 다양한 맛의 초콜릿이 있다. 그리고,-죽기 전 한 번은 꼭 만나길 고대하는-맛난 초콜릿도 분명 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고, 죽지 않는 한, 상자 안에는 무엇이라도 들어있다.

그러니까, 실은 초콜릿 상자라 달콤하게 포장해본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란 고루하고 지루한 이야기다.


선택한 초코의 맛을 보기 전, 이번 초코는 초코가 아니라 liquorish란 예감이 들었을 때 과감 없이 갖다 버릴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liquorish는 맛있게 생겼지만 실은 고무보다도 맛없는 까만색의 젤리지만, 이는 순전히 내 기준이고 어떤 이들은 환장한다. 나에게 맞지 않는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운명이다.

불길한 예감을 믿지 못하고 꼭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입 벌리고 꿀떡 잘 삼키는 게 최선이다. 애매하게 질겅질겅 씹다 뱉어 입맛만 버리는 것보단 낫다 믿으며. 씹다 뱉으면 남은 여운 때문에 다음 초코의 맛을 제대로 느끼 못하는 수가 있다.


상처 받을까 두려워도 시작했다면, 당장 이별을 견딜 자신이 없다면, 일단은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지.

단맛, 쓴맛, 신맛 다 맛보고 꿀떡 삼켜 깨끗하게  입가심 단단히 한 후 새로운 초콜릿을 집어 들면 된다.

이번 초코는 어떤 맛일까 겁이 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매번 일단은 입에 넣고 보는 어리석은 내가 한심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걸.


최선을 다해 본다.

떠날 사람은 어차피 떠난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뭐 하나 제대로 버리지 못하는 나는 여차하면 끝까지 참아낼 심산이었는데 알아서 떠나 준다.

안될 건 안된다. 못 먹을 초콜릿은 결국엔 못 먹는다.


온전한 나는 잊은 채 상대방이 요구하는 모습으로 변신할 필요 없다.

내 본연의 모습을 지키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그뿐이다.

헤어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는 일이 다반사지만,

더 빨리 헤어지지 못했다 해서 그 사람과의 시간을 후회하지는 말자.

한때 자신을 미소 짓게 하였던 것에 대해 절대 후회하지 마라.
- 엠버 데커스

그로 인해 찬란한 게 빛났기도 했을 과거의 시간을 후회하는 일은 슬프다.

그가 나에게 준 기쁨, 행복, 괴로움과 고통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와는 사뭇 다른 내가 되었을 텐데, 지금의 내가 퍽 만족스러운 나로서는 역설적으로 그들과의 과거에 감사해야 할 판이다.


한때나마 이성을 잃게 한,

몸과 마음을 불태울 만큼 사랑했던,

그들 역시 지금의 나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길 바란다. 진심으로.

(나보다는 별로인 여자의 옆이라면 더 유쾌할 것 같다. ^.^ 이 또한 진심이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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