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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Feb 08. 2018

33. 자신감의 근거.

이른 아침에 집 밖을 나섰다. 벗어놓은 옷들에 무거운 몸을 그대로 끼워 넣고서. 동생이 색깔별로 산 보들보들한 흰 니트 안에는 기능성 내복이 벗어둔 그대로 겹쳐있어 입기 편했다. 아침 여섯시 사십칠분, 먼지를 뽀얗게 쓴 붕붕이에 시동을 걸었다. 날이 이렇게 추워지기 훨씬 전부터 먼지 옷을 입었던 내 검은 붕붕이는 이제 거의 회색빛을 띤다. 누가 왜 이렇게 더럽냐 물어본다면 한파 핑계를 대야지. 이런 날씨에 세차는 무리잖아.


월요일 출근을 서두르는 차들 사이에 아직 잠들어있는 남자 친구를 보러 가는 나. 지금 출발한다는 메세지를 남겼다. 어제 내가 마지막으로 보낸 카카오톡 메세지엔 1도 없고, 답도 없다.

나는 섭섭하고, 너는 상처받고, 나는 또다시 섭섭해지는 그런 악순환을 누군가는 끊어야 하는데 네가 해줄 것 같지는 않다. 이미 나에 대한 마음을 접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였다. 이렇게 용기 내어 달려간 마음이 냉담한 얼굴을 마주할 거란 상상을 해본다. 울컥하지만, 이 악순환을 내가 끊지 않고 버텨본들 네가 와줄 건 아니니까. 악순환을 끊기 위해 나를 끊을지도 모르지. 갈 수 밖에. 최선을 다하지 않아 견뎌야 할 후회는 냉담한 네 얼굴보다 오래오래 나를 괴롭힐 거야.


반기지 않는 널 마주할 각오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강변북로를 지나는데 오랜만에 보는 아침 하늘이 예뻤다. 짙은 네이비와 오렌지 빛의 적절한 비율.


다와 갈 때 즈음 전화가 왔다. 가야 할 곳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차가 막혀 대중교통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식이다. 얼굴만 보고 오빠는 시간 맞춰 가면 된다 대답하고 끊었다. 각오는 했지만 기대가 없었던 건 아니니까, 슬펐다.


(빠)파리에 다녀왔다.

(빠)파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빠)파리라서 좋다. 몇 년 전, 처음 와서는 칠렐레 팔렐레 거리다 가장 애정 하던 꽃분홍색 장지갑(한정판!)과 새로 산 아이폰을 적선해야 했다. 이 땅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는 거니 지갑아? T.T 그때부터 지갑에 소중한 물건은 절대 넣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편지라던지, 편지라던지, 아니면 편지라던지.


이 곳에 단골 카페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 2, 3일에 한 번은 꼭 들리는 단골 카페가 하나 생겨 내가 무슨 음료를 마실지 주문하지 않아도 '항상 마시던 걸로 주면 될까?'라고 물을 정도로 친숙한. 그 정도 애착을 가지게 되는 장소가 생길 만큼 머문다면, 이 도시도 나에겐 일상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꼭 빠리지엔느로 거듭날 테다. 한정판 꽃분홍 지갑과, 아이폰 4와 소중했던 편지 몇 개가 남겨진 이 도시가 언젠가는 일상이 되길.

수련 연작을 보고 나와 튈르리 정원에서 (2018. 1. 18.)

(곧 치과의사가 될) 사촌언니와 (아무것도 아닌) 나는 함께 여행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 시시콜콜했지만. 그래도 여행의 마지막 날 언니는 나에게 멘탈이 강한 것 같단 말을 했다. 시험 준비하는 사람 중에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맞아. 그렇게 불안할 것도 없고, 힘들지도 않아."라고 우쭐대며 말했으나 마음에 걸렸다.

곱씹을수록 글쎄.

글쎄, 과연 정말 그럴까 싶었다.


사실은 그저 부족한 자신이 나는 익숙한 것뿐인데.

뛰어나지 않은 내 모습이 익숙해서, 못하는 내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 뿐이다. 찌글 찌글 겨우 풀어낸 35문제 중 10문제를 틀려도, 로스쿨에 입학하지 못해도, 변호사가 되지 못해도. 괜찮다고. 뒤쳐진 듯해도 내 인생과 그들의 인생이 한날한시에 시작하지 않았듯, 한날한시에 끝날 일도 없으니 지금 각자의 자리가 어딘지는 상관없다고. 거기다 갈길이 다른데 빠르다느니, 늦다느니 비교 자체가 안되는걸. 그러니까 동기들은 이미 대리며 과장이 됐으나 난 다시 신입사원이 되어도 별 수 없다고.


난 참 행복한데, 어쩌면 자기기만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과 타협하며 불행이 오는 것 같으면 곧바로 ‘자기기만 카드’를 꺼내 요리조리 피해 다닌다. 가끔 우울하면 ‘자기합리화 카드’를 가슴에 품고 또다시 긍정적으로 하루를 보낸다.


당당하게 실패를 떠벌리는 내가 자신 있어 보이는 이유는 내가 정말로 떳떳하기 때문이다. 결과야 어찌 됐든, 난 언제나 최선은 다한다.

(자기합리화 카드와 자기기만 카드는 최선을 다해야만 효과가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지 않았을 때엔 자기 합리화도 자기기만도 모두 먹히질 않는다. 할 일을 다하지 않았다면 모든 기만과 합리화는 그저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공부 역시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입시에 실패하더라도 자기합리화 카드를 꺼내들 수 있을 만큼은 열심히 한다. 띵가 띵가 노느라 공부하지 않았다면 결과에 구속된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막심할 테니.


최선을 다하지 않아 사랑을 놓치면 행복한 일상을 되찾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아침 꼭두새벽부터 달려가 뻥하고 차일지도 모르지만,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금세 툭툭 일어날 수 있다.


"너는 너무 자신만만한 것 같아."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어?"

잘난 게 크게 없는 나는 상처받는다. 나 자신이 잘난 게 없다는 걸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꽤 만족하며 살고 있는데. 분수를 아는 정도면 잘났지 뭐. ^.^ (자신에겐 넘치는 관대함)

사실, 그 사람은 나 좀 잘났다고 생각해주길 바랬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잘난 척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눈뜨자마자 머리 질끈 묶고 생얼로 도착한 나를 본 너는 웃어준다.


못 본 시간만큼 조용하고 소복이 쌓인 섭섭한 마음을 푸는데 하루,

다시 따뜻한 마음을 쌓는데 하루,

그리고 깊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또 하루.

내가 바랬던 건, 늦은 밤 둘이서 먹는 어묵탕에 소주 한잔. 왁자지껄하지만, 따뜻한 공간에서 잔을 몇 번쯤 부딪히며 섭섭한 마음을 녹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렇게 잠깐씩 봐서는 관계가 회복되다 말고, 굳건해지다 만다.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도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의 최선이 나의 최선과 같을 수 없어 섭섭한 마음이 기승이지만, 그는 분명 많은 부분을 참고 있다.


우리 둘은 상대에게 비슷한 크기의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다. 한쪽이 너무 넘치지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아. 가족들이 나에게 주는 정도의 사랑을 그에게 바라지 말아야지. 어느 누가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그런 걸 요구할 자격이 있을까. 잘 아는데도 욕심은 넘친다.


그날 아침 오빠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 별다방에 들렸다. 별다방 언니가 나의 생얼을 보고 진지하게 어디 아프냐고 묻는다. "커피 드셔도 되는 거예요?"

...

결국, 아픈 척했다.

"며칠 안 좋았는데 이제 괜찮아요. 커피를 계속 못 마셔서 먹고 싶어서요 (***^.^***)"

그래. 그의 사랑은 노란 탱자가 되어 찾아간 나를 진심으로 반겨줄 만큼은 충분히 크다.


점심에 만나 같이 떡볶이를 먹은 뒤, 그는 4시 기차를 타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생일에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이렇게 추운 날 튤립 세 송이를 사 온 그는,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 것.

최선을 다해야지.

결과야 어떻든, 우리 모두 합리화와 기만 카드로 행복만큼은 따놓은 당상이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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