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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Apr 07. 2018

34. 그만둘 용기.

2018. 3. 18. 일요일.

요즘 나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은 나풀거리는 스카프도, 꽃가라 블라우스도 아닌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차콜색 도넛 방석이다. 어디 넣고 다닐 수 없는 사이즈라 당당히 한쪽 팔에 끼고 대학생들의 들뜸이 웅성거리는 신촌을 활보한다. 괜히 더 당당하게 눈에 힘 빡 주고, 무서운 언니인척 노래를 흥얼거리며 세차게 걷는다. 일종의 보호색 위장이랍시고 회색 코트를 걸치고 다니긴 하지만. ^^


의료사고로 인한 두 번의 치질 수술이 남은 2018년의 액땜으로 충분했길 바란다.


분명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나에게 일어날 거라 예측은 커녕 상상도 못했던 상황을 지나오니 기억은 벌써 흐릿하다. 매일 먹는 항생제와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졸음을 이기지 못할 만큼 피로해지는 몸뚱이 덕에 아직 일상으로 완벽히 복귀하진 못했다는 점만이 2월의 사건을 상기시킨다.


가장 일반적인 치질에 관한 오해는 그 원인에 있다. 변비가 가장 큰 원인일 거라 쉽게들 생각하지만, 직접적 원인은 될 수 없다고 한다. 치질의 원인은 스트레스래! (그렇다고 내가 변비가 아니란 건 아니다.^^)

설 연휴를 맞이하여 일반 병원보다 4~5배 정도 비싼 값을 치르고 아주 유~명한 개인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병원은 병원이라기보단 가정집 같았다. 병원에 들어서자 약 냄새가 아닌 북엇국 냄새가 코를 찔렀고, 각 잡힌 병원 베드가 아닌 푹신한 소파가 있었다. 그 병원은 다른 병원과 달리 국소마취를 한다는 점, 입원 없이 수술 당일에 집으로 돌아간다는 점, 재발 확률이 낮다는 점 때문에 유명하다. 입원실도, 번듯한 수술실도 없었지만 의사 선생님은 자부심이 굉장한 분이셨고, 의사로서의 소신도, 사명감도 있는 훌륭한 분인 것 같아 안심이 됐다. 난 소신과 사명감을 품은 사람을 신뢰한다. 한 손에 티브이 리모컨을 쥐고 슈가맨과(파란 편) 아는 형님을(뮤직비디오 제작 편) 보며 수술을 받았다. 중간중간 심장이 빨리 뛰어 힘들었지만 그래도 참을만한 수준이었다. 아는 형님을 보며 낄낄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힘들 때, 웃긴 순간이 오면 얼굴을 찌푸리며 참으려 애써도 웃음은 삐질삐질 새어 나온다. 덜 힘들어서 그런 건지, 그냥 속이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수술이 끝나니 하늘이 빙빙 돌았다. 엄마에게 저녁 메뉴로 스키야키를 요청하고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 다음날 아침 여섯 시 반쯤 화장실에서 피를 쏟았다. 물론 입에서 피를 토한 건 아니다.^^ (눈에서 흐른 것도, 귀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너무 어지러워 몸을 가누지 못하겠는데 이 피칠갑을 치우지 않으면 엄마에게 한소리 들을 것 같아 걱정하는 와중에 잠귀 밝은 동생이 나타났다.(구세주)

짧은 인생 동안 화장실에서 구세주를 맞이한 두 번째 순간이었다.


첫 번째는 입사 초기 요도염에 걸렸을 때. 부서 발령받고 3개월이 채 되기 전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해서 할 일을 마치니 그제서야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조퇴를 했다.(인간의 정신력은 위대하다.) 그날은 어버이날이었다. 나는 잠실에, 엄마랑 동생은 호주에, 아빠는 일산에, 그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내 첫사랑은 여의도 사무실에 있었다. 변기를 부여잡고 거의 반 기절해 있다가 퇴근하자마자 달려온 그 사람을 보니 ‘이제 살았다’란 안도감이 들었던것도 같은데 그 이후에 병원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이 흐릿해. 그 사람은 응급실에서 뒤늦게 도착한 아빠와 대면했고, 아빠와 대화를 나눈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 친구의 자리를 여지껏 지키고 있다. 그해 나는 그 사람네 어버이날 행사를 제대로 망쳤지만, 그에 관해서 들은 이야기는 없다.

첫사랑 이야기와 신입사원 행군 이야기는 한번 시작하면 너무 길어진다.                                      

한번 시작하면 끝나지 않는 군대 이야기 마냥. 흡사 영웅담처럼.


아침에 북엇국 냄새가 나는 그 병원으로 가 다시 한번 피를 쏟았다. 한차례의 과호흡증이 지나고 혈압은 오를 기미가 없고 어지럼증은 심해지고 속이 메슥거렸다.(엄살) 세네시쯤까지 참다 결국 119를 불렀다. 구급차는 생전 처음이었다. 난 뭐든 최대한 참아보는 편인데, 미련해서기도 하지만 그만둘 용기가 없어 포기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특히 연애에서는 더더욱.


구급차에 누우니 '운전할 때 구급차가 오면 항상 비켜줬던 것에 드디어 보답을 받겠네'라는 생각이 들더라. 남자 친구가 걱정할 것 같아 동생에게 연락을 부탁했다. 후에 들은 이야긴데, 이 난리통에 남자 친구가 나에게 연락을 몇 번 하지 않았던 게 동생은 서운했던 모양이다. 일부러 한 시간 뒤에나 연락했단다. 그 한 시간이 그에게 큰 영향을 줬을 것 같진 않지만.

혈압이 떨어지고 헤모글로빈 수치(헤모글로빈의 양이 기준에 못 미치면 빈혈 진단을 받는다.)가 낮아 수혈을 해야 했다.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해봤지만 입원을 하게 됐고, 3팩 정도 수혈을 받았고, 피는 또 났고, 결국 새벽에 응급수술을 받았다.


작년 여름에 엄마랑 사주를 보러 갔었다. 올해 가족들과 나의 인연이 끊긴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 우린 당연히 시집가나 보다 했었다. 수술실 앞에서 엄마는 갑자기 그때 들은 이야기가 생각이나 내가 죽을까봐 울었다. (아무리 그래도 치질 수술하다 죽을만큼 기구한 운명일리 없어!)


나의 중요한 구멍에 실수를 범한 의사는 엄마와의 통화에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실수를 인정했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받았다. 역시 소신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 안도했고 정말 하늘에 맹세코 요만큼의 미움도 없었다. 인간적인 대화를 기대하고 병원에 찾아간 엄마는 180도 변한 의사의 태도에 억울하고 화가 나 울었다. 나는 이전에 전화로 했던 사과의 말이 그 사람의 진심일 거라 생각했다. 그 사람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어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그 사람의 그릇이 그 정도일 뿐이라고.


그날 밤은 유달리 아팠고, 미운 마음이 몽글몽글 올라올 것도 같았다. 자면서 우는 나를 엄마가 깨웠다. 무서운 꿈은 아니었다. '품위유지라는 게 힘든 일이잖아요.'라는 말이 꿈속 나의 마지막 대사였다. 나는 의사를 향한 분노라는 날감정을 나 자신에게 조차 숨긴 걸지도 모른다. 타인의 악의 없는 실수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일은 분명 품격 있다. 어쩌면 나는 마땅히 품위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건 아닐까.

넓지 않은 그릇을 넓히려 부단히 애쓰는 나의 가소로운 노력이-남들에게는 '가만히 있는 가마니'로 치부된다 할지라도-내 안의 품격으로 결실을 맺길.


치질 수술한 게 뭐 자랑이라고 이렇게 길게 기록하지. 그러나 첫사랑도, 행군도, 치질 수술도 모든 영웅담은 한번 시작하면 좀처럼 입을 닫을 수 없는 법. ^^


5일 뒤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빠가 한번 왔었다. 같이 있으면 참 좋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냐면 헤어질 때 찔끔 눈물이 났다.(셀프 깜놀!) 같이 있는 시간이 짧아서 좋은 시간이 짧은 게 문제라면 문제다. 업무가 바빠 아픈 내게 관심이 없는 오빠에게 투정을 부리고 만다. 수술했으니 아픈 게 당연한데 어떻게 매번 신경 쓸 수 있냐는 경악스러운 답장이 돌아온다. 맞는 말이지. 그러나 맞는 말이라고 항상 옳은 건 아니다. 또 항상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 돌이켜보니 이 사람에게 경악스러운 말을 꽤나 듣는 것 같다.

이 사람은 그저 멀티태스킹이 안될 뿐인데, 눈앞에 산적한 업무를 보느라 눈앞에 없는 나를 신경 쓰지 못할 뿐인데.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내가 문제다. 알면서도 절제가 안돼.


오빠랑 멀리 떨어져서 지낸지도 벌써 꽤 되었다. 3월에 제주도 여행을 가기로 했었는데 예정 없던 중요부위의 크나큰(?) 손상으로 제주도는 무리일 것 같아 인천에 가자고 했다. 나는 카톡으로 틱틱거리면서도 그날을 알게 모르게 엄청 기다렸지 싶다. 잦은 검색으로 서울과 인천의 핫플레이스를 마스터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약속 전날 전화로 저녁만 잠깐 먹고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일주일 넘게 유럽 출장을 다녀온 지 3일 만에 중국으로 갑자기 출장을 가게 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 분명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럼 한껏 부푼 기대는? 인천은? 마스터한 핫플레이스는?

왜 약속을 뭉게 버리는 걸까. 왜 아무런 약속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할까. 타당한 이유가 있다하더라도 약속이 그냥 증발하는건 아니잖아. 난 이미 훨씬 전 부터 그 시간을 비워뒀는데 갑자기 공백이 생겨버린 나의 시간들이 억울해서 목이 메였다. 화가 나는 걸 떠나서 맥이 풀렸다. 나만 아쉬운 것 같아서. 이런 일에 매번 실망하고 속상한 내가 제일 답답하다.

이번에 같이 있게 되면 속상함에 꽉 막혀버린 응어리를 풀어버리고, 행복한 시간을 둘이서 함께 하고 싶었다. 너와 내가 함께, 서로를 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음 했다. 앞으로 떨어질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나는 내가 어떤 사랑을,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이 관계가 마뜩잖은 건 확실해. 내가 좀 예민-아니, 과민-한 편인 것도 확실하다. 함께 하는 미래가 과연 행복할까 의구심이 생긴다. 엄마도, 동생도, 아빠도, 단골 맛집도 없는 부산에서 나에게 신경 못쓸 날이 많을 너와의 생활이 행복할까?


결국 나는 오빠에게 이번엔 잠깐도 보지 말자고 해버렸다.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확신을 잃었다고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오빠 역시 우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라고도. 그는 지금 아마 중국에 있을 거다. 내 생각은 안하고 있을거고. 이렇게 잘 아는데도 왜그리 서투를까?


깜빡하고 있었는데, 첫사랑과 어떻게 헤어졌는지 문득 기억이 났다.(또 시작되는 영웅담.)

그때도 뭔가 점점 만남이 불편해져서 내가 먼저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했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여의도 이자카야에서 오뎅탕을 앞에 두고 차였다. 날 찰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준거지 뭐.


그냥 그사람의 마음이 전 같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전 같지 않은 마음을 참지 못한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고, 그렇게나 많은 연애가 쌓였는데도 달라지지 못했다. 초연하고 싶다. 그깟 마음 따위에. 남의 마음따위에 흔들리는건 그만하고 싶다.


하고싶은 일은 곧바로 해치워버린다. 하지않아 남는 후회는 시도해서 남을 후회보다 크기 마련이니 망설임은 없다. 그러나 그만둬야 하는 일은 당최 어찌해야할지 오리무중이다. 멈춰야할지 말지도 문제이거니와 지금이 그만둘 타이밍인지도 헷갈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만둘 용기 없는 나대신 그들이 항상 알아서 그만둬준다.


이번에도 똑같다. 나는 이 사람이-눈물이 찔끔 날만큼-좋다. 내가 좋아하는 이 사람이 나한테 신경 좀 써주면 좋겠다. 내가 가족들과 떨어져 부산에서 힘들 수도 있지만 더 신경 쓸거라고, 부산에서도 둘이 함께라면 분명 행복할 거라고. 뭐 그런 말이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 듣지 않으면 안되는 말이였지 싶다.

내가 원하는 건 나한테 꼭 맞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이 사람의 변화였다.

관계의 종말은 이런 허황된 욕구로부터 시작된다.

일주일 뒤, 이번에도 차이겠군.

이쯤되면 이젠 진짜 내 문제가 뭔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 모두 나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이유가 분명 있을텐데. 이왕 찰거 알려나주지. 담번엔 좀 잘해보구로. 정말 지치지도 않고 차이는구나.

*^.^*신청곡: 윤종신의 끝무렵 *^.^*


워커힐에 가야 할 것 같아 몸이 근질근질하다. 피자힐에서 쫀득한 시금치 도우 위에 통 훈제 베이컨이 올라간 팬 피자를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언덕 위의 벚꽃송이가 흩날리는 모습은 꽃이라기 보단 분홍빛 눈송이에 가깝다. 눈을 뜨기 어렵다고 느낄 정도로 펑펑 꽃송이가 떨어진다.


그래. 부산엔 피자힐도 없다.


전생에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이렇게 운명의 상대들이 넘쳐나는 걸까. 뭐 얼마나 더 많은 남자를 만나야 연애경력에 마침표를 찍으려나.(몇번을 더 차여야?)


그래. 남은 운명의 남자들이여, (남았겠지..?ㅎㅎ)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끝.-

+ 2018. 4. 7.

차이면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호기롭게 글을 써뒀으나,

결국엔 전화로 질척였다.

2시간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 끝에 설득에 성공했다.

아~ 정말 뭐 하나 쉬운게 없당. 구멍도, 연애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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