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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Mar 20. 2016

04. 결정장애 세대(Generation Maybe)

마틸다 레드, 루비 레드, 스칼렛 레드. 선택의 폭이 클수록 울고 싶다.

점심 메뉴를 당최 결정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네가 먹자는 백반은 먹기 싫네.

암 걸릴 것 같은 인간으로 매번 손꼽히는 그 부류, 여기에도 한 명 있습니다. 현대인의 40%에 육박하는 인구가 결정장애라는 통계도 있다 하니 발암물질만 걱정해서 될 일이 아니다. 발암 인간을 피할 방안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결정장애는 비단 나뿐 아니라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일종의 시대적 현상이다. 전문가는 이러한 현상이 '호불호는 명확해진 반면 위험회피 성향은 상승'함에 따라 발생한다고 진단하는데 본인이 시대적, 사회적 현상의 일부로써 전문가들에게 일감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일견 유용하기도 할 테니 위안을 삼아 본다.


왜 결정하지 못하는 걸까?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막상 일어나면 웬만한 일은 견딜 수 있는 내성도 생겼을 텐데,

왜 이토록 일상적 쫄보로 성장하고 만 걸까.


선택의 책임은 온전히 내 몫이다.

훌륭한 선택도, 잘못된 선택도 결정을 내렸다면 그에 따르는 결과는 온전히 내 선택의 피조물이다. 내 책임이고, 내 탓이고, 후회도 오롯이 나의 몫이고.


그러나 만인을 위한 옳고 그름의 기준을 과연 누가 제시할 수 있을까?

어떤 선택이 그른 선택인 걸까? 그럼, 옳은 선택은?


본인이 결정한 선택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고 때로는 내 탓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일에 따르는 결과도 내가 떠안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을 택하기 전,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은 옳고 그름의 기준을 자신이 아닌 사회의 통상적 기준이나, 타인의 안위를 위하는 쪽으로 설정하는 치명적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금요일 저녁, 2차로 온 소주집에서 안주의 카테고리는 무조건 얼큰한 탕이어야만 한다(명확한 호불호).

선택의 폭은 순식간에 네 가지로 좁혀진다. 어묵탕, 나가사끼 짬뽕, 조개탕 그리고 알탕.

해산물을 명확히 선호하는 우리는 신속하게 어묵탕과 나가사끼 짬뽕을 제쳐버릴 수 있지만, 조개탕과 알탕 중 어느 하나를 도저히 선택하지 못하는 기나긴 발암의 시간이 지속되고 만다.

※조개탕이냐 알탕이냐.

1. 국물: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어 시원한 조개탕이냐 고춧가루를 팍팔 풀어 얼큰한 알탕이냐.
2. 가격: 동일하다.(안돼!!!!! ㅠㅠ)
3. 개인 선호도: 가끔 운 없으면 해감이 덜된 조개를 씹어 모래 때문에 불쾌해지지만, 대세가 이미 청양고추 송송 썰려 들어간 맑은 조개탕 국물로 기울고 말았다. 뭐, 파나 시원한 국물만 있어도 소주 1병이 거뜬하니 크게 상관없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연히 알탕을 먹는 게 어떠냐 제안이라도 해봤어야 정상이다. 아니 결국 계산은 엔빵인데 파와 국물만 먹어도 상관없다니. 절대 그렇지 않다. 다만, 다들 조개탕이 더 먹고 싶었는데 혹여나 때문에 알탕을 먹게 되는 일은 싫어. 그도 아니면, 내가 우겨서 알탕을 먹었는데 맛이 없으면 어떡해. 이도 아니라면, 시뻘건 알탕 국물 탓에 조리사가 실수로 머리카락이라도 빠트린 채로 음식을 완성하면 어떡해. 이것마저 아니라면, 그날따라 알이 신선하지 않아 모두들 탈이 나면 어떡해.


그러니까 나의 두려움은 '에이, 조개탕 시킬걸 그랬어.'라는 결론.

즉, 그러지 말걸 이란 후회다.


물론 그 어떤 뜻하지 않은 결론도 겪을 일없이 평탄한 삶을 살게 되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인간은 단언컨대 그 누구도 없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의도치 않은 결론에 뒤따르는 후회만큼은 절대 불가피한 일이 아니다.


후회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생긴다.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내린 선택이 기대와 다른 결과로 이어진데도 후회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시간을 백번 되돌려도 백번 같은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확고한 기준을 가진다면, 적어도 후회만큼은 피해 갈 수 있다. (물론, 나이를 먹어가며 선택의 잣대인 기준 또한 흐르는 세월에 따라 바뀔 테지만.)


나는 '기준'이란 단어를 참 즐겨 쓴다. 아마도 가장 빈번히 사용하는 어휘 중 하나이지 싶다. 사람마다 생각과 가치관의 기준이 다를 뿐이니,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은 타인의 행동에 세모눈을 치켜뜰 필요가 없다.(내 눈은 원래 세모다. 치켜뜬 게 아..... 니.......죠..) 모두는 모두와 다른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은 각자가 겪은 모두와는 다른 선택과 결과를 토대로 한다.


존경받을 수 있는 기준은 드물지언정, 존중받지 못할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다.

('알겠니? 나에게 네 틀을 강요하지 마. 난 너 하고 싶은데로 다 내버려두잖아^^'란 말은 항상 턱끝까지 차오르지만 입 밖으로 뱉어보질 못했다. 정작 맞춰주면 다들 시시하다며 떠나버린 과거의 짧은 시간 동안 사랑했던 남자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겪은 최악의 남자는 본인만의 기준이 없는 남자였단 사실로 미루어볼 때 과거의 나 역시 누군가에겐 최악의 연인으로 종종 안주거리가 될 것이란 확신에 가까운 짐작.

누군가의 기준은 그 누구도 감히 간섭하거나 침해할 수 없지만 아직 그러한 기준이 부재하다면 모든 기준의 시작과 끝을 본인의 행복에 두는 편이 좋다는 점 하나만큼은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조개탕과 알탕, 이직, 연인과의 이별 등 그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의 유일한 기준은,

오직 자신의 행복 단 하나다.

※조개탕 vs 알탕
1) 조개탕에 든 파와 국물을 건져먹기보다는 알탕을 먹는 편이 더 행복하다.
2) 그러나 함께 한 사람들 중 알탕을 안 먹는 사람이 있다면 나로서도 마음이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에 불편하다.
▶결론: 다들 알탕을 좋아한다면 알탕을, 알탕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묵탕을 먹어보자. (어묵도 생선의 향을 2% 정도는 함유하고 있잖아.. 이 정도면 해물이라고 우겨볼 여지는 있잖아요.)

※이직
1) 저 팀장보다 더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세상은 이미 말세다.
2) 지금 하는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고 눈 앞의 모든 것을 부수고 싶다면 그만두자.
▶결론: 하고 싶은 다른 일을 고민 끝에 발견했다면 이직을 하자.

※이별
1) 상대방의 기준과 나의 기준이 너무 달라 매 순간 실망하고 불행하다.
2) 그는 나에게 맞춰줄 마음이 없고 나 역시 애써보지만 쉽지 않고, 곧 불행하다.
3) 애쓰고 있지만 그 사람은 내가 탐탁지 않고, 나도 지친다.
▶결론: 그의 존재로 불행하지만 그의 부재가 너무 괴로울 것 같다면 더욱 노력하여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쪽을 선택하라. (그러나 이별로 겪을 불행은 잠깐이고, 지금 이 불행은 그의 곁에 있는 한 영원히 지속된단 사실은 자명하다. 이별을 강추하지만, 정작 나 또한 직접 이별을  선택하지 못하고 끝까지 비벼보다 결국엔 차인다.)

아쉽게도, 자신이 언제 행복 해지는지에 관한 해답 역시 때때로, 자주 아리송하다.

그럴 때면 언제나 불행에 안주하기보다는 어떤 쪽으로라도 선택하고 행동하는 편이 후회가 적기 마련이란 사실을 떠올리며 움직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저지른 일에 따르는 후회는 극복하면 그만이다. 저지르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는 마땅히 기를 쓰고 극복할 것조차 없어 영원히 미련으로 남고야 만다.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이나 누군가 고민할 때, 나는 무조건 해보라고 권하는 편이다.
외부의 사건이 이끄는 삶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이끄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리적 변화의 곡선을 지나온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 김연수, 소설가의 일 중에서


세상사 요지경이라 당장 보기엔 최악의 수였다 싶은 결정도 살다 보면 그때 그 실수를 했어서 참말로 다행이라고 무릎 치며 깔깔 거리는 일도 왕왕 많다.

그러니까 결국 나도, 너도, 호랑이 할아버지도, 용한 점쟁이도,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1년에 2회 정기적으로 사주팔자를 보러 다니는 나는 모순의 결정체지만.)


사소한 결정에서부터 중대한 결단에 이르기까지 행복하기 위한 최선의 해답을

고민하고, 노력해서, 선택하면 로또 1등 당첨처럼 인생을 한방에 꽁으로 먹을 순 없겠으나

어제보다는 행복한 오늘을 맞이하고, 오늘보다는 행복한 내일을 사는 하루들이 마냥 불행한 날보다 며칠쯤은 더 많을 거라는 희망 정도는 과감히 품어보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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