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고 살아온 삶이다. 가지 말라는 곳, 먹지 말라는 것은 모두 금하며 살았다. 덕분에 인생에 재미는 잃고 안정을 얻었다.
늘 하던 것을 하지 않고 싶은 마음이 조금 생겼다. 마침 한 학기 동안 힘에 부쳤고, 아팠으며, (정신적으로) 조금 많이 괴로웠다. 벗어나기 위해 일을 택하던 과거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어졌다.
마침, 아이는 일찍 잠에 들었으며 지금부터 늦은 밤까지는 오롯이 혼자서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얻었다. 평소 같았다면 밀린 글을 쓰거나 블로그를 돌보았을 텐데 오늘은 어쩐지 그 모든 것을 하고 싶지 않다.
냉장고에 고이 잠자고 있는 맥주를 하나 꺼내고, 요새 내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안성탕면 하나 끓여 놓고 계란 풀어 휘휘 저어가며 맥주 한 입, 라면 한 젓가락 하며 야식을 한 번 먹어보고 싶다.
그도 아니면 평소 보고 싶었지만 겨를이 없어 볼 수 없었던 영화, 드라마, 예능 따위를 몰아서 보며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것들을 해보고 싶다. 봐도 봐도 재밌는 <더 글로리>는 아이 앞에서는 절대 볼 수 없으니까, 보다 멈춘 부분부터 다시 시작해 보는 것도 좋겠다.
지금 읽고 있는 <쓸 만한 사람>이라는 책을 마무리 짓는 일도 해봄직 하다. 겨우 50페이지도 남지 않은 책을 다 읽고 <소년이 온다>라든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따위의 책을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S가 꼭 플레이라던, 혹시 플레이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쌤 연락 주세요, 라며 번호까지 알려준 게임을 해볼까도 싶다.
방학 동안 다섯 권을 읽기로 했는데 방학 1주 차에 벌써 다섯 권은 뚝딱 섭렵하고 난 뒤에 동네 도서관에 가서, 혹은 학교 도서관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한 열 권 정도를 더 빌려서 읽어보는 것은 어떨지. 그래서 누구도 안 써주는 과목별 독서활동을 나는 브런치에 남기는 거지. 후후.
교수학습평가계획 따위는 8월 15일의 내가 하라고 하고, 지금은 그저 평소에 읽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쌤 꼭 읽어보세요! 했지만) 시간을 핑계로 미루고 미룬 <슬램덩크>나 <스파이 패밀리>나 <하이큐> 같은 작품을 보기 시작할까? <약사의 혼잣말>, <날씨의 아이>, <너에게 닿기를> 등 일본 애니가 좋겠다. 나 사실 일본 애니 좋아해...
방학 때 매일 계획만 세우고 미루는 일 중 남바완(왠지 이렇게 쓰고 싶...)인 방 청소, 집 청소를 하루에 한 영역씩 해볼까? 오늘은 옷장, 오늘은 서랍장. 주변을 치우면 힘이야 들겠지만 개운한 시야를 얻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이건 아마 제일 나중까지 미루겠지. 하하.)
방학 첫날, 참으로 일탈 같지도 않은 일탈을 계획하는 내가 웃기다. 뭔 놈의 일탈이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청소를 하는 거냐 싶다. 그중에 제일로 일탈스러운 게 겨우 맥주 한 잔 하는 건데 그 마저도 '다이어트'라는 방학 목표에 눌려 과연 할까 싶다.
긴장 속에 살아 그렇다. 커피를 좋아하긴 하지만 매일 다섯 잔을 마실 만큼은 아니다.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늘 있었다. 일은 많았고 그에 더해 나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완벽하고 싶어 다그치고 괴롭히고 후회하고 다시 다그치는 1학기였다.
전임자와 비교하고 비교하며 좌절하고 좌절하다 분노하는 지질한 하루의 끝엔 짜증과 피로가 몰려왔다. 모든 일의 중심엔 64기가의 작은 유에스비가 있었다. 잃어버리면 끝이야, 멈추면 끝이야, 이 일을 누가 다 해, 내가 해야지, 하며 버틴 하루하루가 일단락되자 자꾸만 일이 아닌 다른 것을 하고 싶어진다.
하루 종일 티브이만 보거나
하루 종일 책만 읽거나
하루 종일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창 밖에 지나가는 구름 따위를 보는 일. 대학생 방학 때 하는 일, 아니 고등학교, 아니 중학교 방학 때 하는 일. 그런 것만 하고 싶어진다.
태생이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분명 나는 내년에 행복하기 위해 현재 조금 고생하는 것일 뿐인데 가끔 고생의 경중을 따지며 억울도 했다. 결과적으로 다 좋으면 된 거라지만 올해 나의 '과정'은 많이 고됐다. (해왔던 일이 모두 다 별로란 것은 아니었다. 개중엔 나를 일으켜 세우는 일들이 더 많았다. 글쓰기는 뺄 수 없는 기쁨이다. 오해 마시라.)
특히 아이에게 많은 부분 미안하다. 일하는 엄마가 예민하고 짜증도 많은데 하필이면 그 딸이 그 기질을 물려받은 채 여덟 살이 되었다. 자기만의 세상에는 없던 다양한 인간을 만난 딸은 학교에서의 짜증을 꾹꾹 눌러 집에 왔고, 일하는 못난 엄마는 풀지 못한 화를 담아 아이에게 터뜨렸다. 조절되지 않은 감정은 하늘로 올라가다 터져버리는 풍선처럼 예고 없이 팡, 팡, 터져댔다.
그래서
이번 방학은
일 생각 좀 지우고
일 냄새나는 것 좀 빼고
다른 걸 좀 해보려고 한다.
아이랑 같이 현재를 좀 살아보려고 한다. 같이 키즈카페도 가고, 전시회도 가고, 음악회도 보고. 같이 책도 읽고, 만화도 보고, 과자도 먹고. 방학 숙제가 나오면 좀 그런 거 정도는 슬쩍 미뤄보기도 하고. 도서관 가서 책을 빌릴 것처럼 다 꺼내놓고 그냥 돌아와 보기도 하고. 비 오는 날엔 크록스 신고 발가락에 물 차도록 웅덩이만 찾아 뛰어보기도 하고. 평일 아침에 11시에 일어나서 부스스한 머리에 목 늘어난 티셔츠 입고 서로 소파에 앉아서 한참을 멍 때리다가 한번 터진 웃음을 멈추지 못하면서. 그러면서, 내 안에 독처럼 쌓인 '일'좀 빼고 싶다.
과거에서 나오고 미래에서 탈출하면 지금 현재에 머물 수 있겠지.
나의 현재는 지금 방학 중이고, 아이는 여덟 살이며, 분명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
마침 나는 다음 주 월요일과 수요일에 공식적인 외부 약속을 마치면
누구와도 '만날' 약속을 잡지 않았다. 이번 방학의 공식 컨셉은 칩거다. 휴대폰은 방해금지 모드로 바꿔놓을 작정이라 웬만한 중요한 일 아니면 나가지 않겠다. 이러다가 내가 똑 죽겠다.
대신 충분히 미루며 충분히 게으르게 살 거다.
게으르고 방탕하게.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삶을 좀 살아보자.
그래, 다이어트는 내일의 나에게 미루고 오늘은 맥주 한 캔 마셔야겠다.
게으르고 방탕하게.
안성탕면 물 올리러 간다. 지금! 롸잇 나우!
추신: 이 글 쓰면서 나는 또 원격 연수원 들어가서 연수를 돌리고 있....
가만 보자... 맥주가.... 몇 개 남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