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2)

by 안녕

화장실에서 너는 잠시 숨을 고른다. 부러 손을 닦고 나와 화장실에 갈 이유가 있었음을 티 내기로 한다.

인터뷰어는 너를 보곤 자세를 고쳐 앉는다. 짐짓 밝은 체를 하며 말을 꺼낸다.


-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 아. 다녀오셨어요? 자, 그럼 지금부터 다시 질문 들어갑니다!



15. 글을 쓰는 이유가 생각과 감정을 영원히 남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요. 그 방법으로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선택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네이버 블로그, 다음 블로그, 티스토리 등등. 안 해본 곳이 없는데요. 전부 제대로 익명성이 보장이 안 되어서 실패했어요. 게다가 이상한 광고 댓글로 막 붙더라고요. 그런데 브런치스토리는 그런 게 없어요. 진짜 내 글이 좋은 사람들만 라이킷을 누르고 댓글을 달아요. 또 작가가 되기 위해선 원고를 제출하고 통과되어야 한다는 것도 매력적이었고요. 저, 아직도 브런치 작가 선정 메일 캡쳐본 가지고 있다고요!



16. 되게 귀여우시네요. (웃음). 그럼 조금은 가벼운 질문 가볼게요. 혹시 지금까지 근무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으세요?

음... 되게 어려운 질문인데요? (망설이다가) 저는 사실 되게 기억력이 좋아요. 10년 전, 20년 전 일들도 아주 작은 단서만 있으면 금세 기억을 해내요. 그래서 첫 제자로 만난 아이들부터 지금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까지 모두, 대부분 다 기억을 해요. 또, 저는 의미를 찾는 성격이에요. 제 앞에 있는 아이들 모두 하나하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아이들의 의미를 찾아 알려주는 걸 기쁨으로 여겨요.



17. 아니, 그러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으시냐고요! 기억력 좋으신 건 알겠고..!

제가 좀 미괄식을 좋아해서. (웃음) 결론은! 전 제가 만난 아이들이 대부분 다 기억에 남는 제자예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문득문득 떠오르고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요. 이름과 얼굴이 매치되지 않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선생님이라고 존중해 주고 좋아해 준 기억이 떠오르면 모두가 다, 소중한 제자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18. 네네. 맞죠. 모두가 다 의미 있다는.. 그런데 그래도 정말 진짜 단 하나. 나중에 내가 책을 쓴다면 서문에 써보고 싶은 에피소드의 주인공? 뭐 그런 건 있지 않으세요? (집요함이 담긴 눈빛이다.)

흠... 그렇게 본다면 있죠. 아무래도 첫 제자가 잊히진 않는 것 같아요. 소윤이, 지윤이, 지민이, 그리고 유라는 잊을 수 없는, 나의 1 호팬이에요. 나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주던. 그 아이들이 벌써 스물일곱인데요. 문득문득 보고 싶어요.



19. 크흐.. 역시 첫 담임은 잊지 못하는군요! 좋습니다. 그러면, 또 조금 가벼운 질문을 해볼게요. 혹시 스트레스받으면 어떻게 푸세요?

아. 어렸을 땐 무조건 잤어요. 그래서 고2 겨울방학부터 고3 초까지 매일 잤어요. 스트레스가 감당이 안 돼서. 덕분에 수능 망했고, 대학은 뭐. 노코멘트할게요. 요새는 스트레스받으면, 요리를 해요.



20. 오! 요리! 어떤 요리를 즐겨하세요?

한식을 좋아해서 주로 한식을 자주 해 먹는데 의외로 만들기 어려운 계란말이를 좋아해요. 돌돌돌 말며 틀을 잡아가면 어김없이 고소한 냄새가 나요. 갓 만든 계란말이에 맥주 한 잔 마시는 게 요새의 낙이랍니다.



21. 그런데 보통 요리는 힘들어하지 않나요? 선생님처럼 일하시면서 집안일하는 경우엔 배달 음식 많이 드시던데.

맞아요. 처음엔 배달음식 많이 시켰는데 일단 비싸고, 용기 처리도 불편하고, 무엇보다 딸이 먹질 않아서요. 두 번 상을 차리더라고요. 그래서 만들어 먹다 보니 오히려 좋고요. 특히 요리를 하면 다른 걱정들을 잠시 지울 수 있어요. 불 앞에서 웍을 잡고 무언가를 볶거나, 뒤집개로 뒤집을 때는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돼요. 다치거든요. 당근을 채 썰거나, 햄을 볶을 때에도 마찬가지죠. 그 순간이 좋아요. 일터에서 가져온 온갖가지 잡념을 지울 수 있는 그 순간! 요리를 하면 그렇게 힐링이 되고, 저녁을 살아갈 수 있더라고요. 학교 일 지우고, 오롯이 가족에게 집중할 수도 있고요.



22. 그렇군요. 학교에서 일이 많으신가 봐요.

제가 근무하는 학교가 좀 작은 편이어서 교사 1인당 해야 하는 업무량이 많아요. 저는 보직교사를 맡았는데 옛말로 연구부장을 하고 있어요. 원해서 한 일인데 역시나 힘들어요. 학기 중엔 글쓰기 거의 불가능할 정도. 그래서 부장님들은 보통 수업을 대충 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행정일이 너무 버거워서. 그런데 저는 쫌 또 욕심이 있어서 수업은 수업대로, 일은 일대로, 글은 글대로 잘하고 싶어서 매일 새벽까지 일을 하다 자요. 그러니까 힘들죠. 들들 볶으니까.



23. 아유. 그러다가 쓰러지세요!

그렇지 않아도 7월 초에 정말 쓰러질 뻔했어요. 너무 아파서 병원에서 링거를 맞는데 제게 주어진 시간이 딱 30분인 거예요. 아이 하교까지 30분.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나 아파도 제대로 쉴 시간도 없는 이런 삶이 맞아? 하면서 허무감이 미친 듯이 몰려오는데 진짜 감당 안 돼요.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감정적으로 가라앉으면 도움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7월 초가 조금 힘들었어요. 매일같이 이제 다 했나 싶으면 또 있고, 또 오고.



24. 안쓰러워요. 쌤.

문득 그런 생각 들더라고요. 아,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고생하고 있지? 나 왜 이러고 살지?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저녁엔 이따가 일 해야 하는데, 하는 걱정 없이 밥 먹고 애랑 놀아주는 건 왜 못하는 거지? 내가 뭘 위해서. 뭘 그렇게 부귀영화를 누릴라고.


그 생각이 드니까 진짜 일하기 싫더라고요. 이성 간신히 붙들고 마무리하긴 했는데요. 사실 요새 제 화두는 그거예요. 내가 진짜 교사로서 하고 싶었던 게 뭐였지? 에 대한 답을 찾는 거요. 방학 중에도 일하던 인간이었는데요. 제가 요새는 집안을 치우거나 요리, 책 읽기, 글쓰기만 하지 일은 안 해요. 그리고 생각해요. 사실, 다 이게 딸이랑 시간 많이 보내고 싶어서 시작한 건데, 어쩐지 주객이 전도됐잖아요?



25. 그럼 진짜 살고 싶은 모습은 어떤 모습이에요?

저는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얼굴) 일단 학교 일은 최소한으로 하고요. 평일에 여유 있게 저녁을 보내는 거예요. 뒤에 할 일이 있든지 말든지 그냥 오늘 하루를 잘 마무리하는 거예요. 그리곤 아이랑 놀다가 스르륵 잠도 들고요. 원하는 글감이 있으면 이렇게 글도 쓰고요. 그러다가 내가 쓴 글이 대박이 나서, 글을 쓰는, 책을 만드는 선생님으로서 자리를 잡다가, 학교를 그만두는 게 목표예요.



26. 정년퇴임 하는 거 아니셨어요?

그런 슬픈 이야기 마세요. 명예퇴직 하면서 글 쓰고 강연하고 책 내면서 사는 게 제 꿈이라고요. 그런 제 모습만 상상해도 좋을 정도로!



27. 아! 그 정도세요? 몰랐어요.

아주아주 힘들 때, 학교에서 일하는 기계처럼 느껴질 때, 아이들과 소통이 어렵거나, 수업을 망해서 교실을 나오는 뒷모습이 뻐근할 때 저를 일으켜 세워 주는 건은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에요. 저는 교사이기 이전에 글로 소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이들과 수많은 글쓰기 활동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예요. 이 세상에서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책을 낸 사람이야. 나는, 조금은 특별해.


그 정체성이 없다면 전 시들어 버릴 거예요. 아마도.



28. 와우. 이렇게 진지한 이야기까지 나올 줄 몰랐어요! 그런데 선생님. 점심시간이라 일단 밥 먹고 할까요? 오늘 돈가스에 스파게티 나온다고요!

(고개를 심히 끄덕이며) 그럼요. 저는 점심 먹으러 출근하는 사람입니다만. 얼른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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