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이른 아침, 가장 먼저 잠에서 깬 나는 서재에 가서 오늘자 브런치에 올릴 글감을 정리하고 있었다. 8시가 조금 넘으면 정확하게 눈을 뜨는 딸내미의 인기척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글을 끄적이고 있는데, 역시나 8시 20분 즈음되어 '엄마'를 부른다. "일어났어~?"라며 다정하게 다가가 묻자, 기저귀 갈아 달라며 다시 요 위에 눕는 그 모습이 참 사랑스럽다. 밤 사이 제 역할을 열심히 한 기저귀는 빵빵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나는 얼른 좋아하는 공주 팬티를 가져가 꼬드긴다. 오늘은 팬티 입자고.
그런데 갑자기 나를 힐끗 보더니 한 마디 던진다.
"엄마는 나가 있어."
이렇게 쫓겨난 지 벌써 꽤 되었다. 자고 일어나면 꼭 엄마를 찾던 녀석인데 어느 날부턴가 잠이 깬 직후 불러 방으로 가보면, 날 보며 싱긋 웃다가 갑자기 "엄마는 나가 있어"라고 말한다. 그럴 때면 나는 "알았어~"라고 최대한 부드럽게 답하곤 진짜로 방을 나가야 한다. 그때 괜히 말을 더 걸거나, 혼자 있으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하면 기분 좋게 시작된 아침 일과가 울음과 짜증으로 범벅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한 번은 방 밖에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엄마 껌딱지인 녀석이 내가 필요 없다고? 나가 있으라고?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지? 혹시... 더 자려고 하나(그러면 완전 땡큐고), 아니면 설마 이불을 정리하나(그럴 리가...), 하는 맘에 슬쩍 들여다보았더니...
녀석은 좋아하는 가제 손수건을 양손에 움켜쥐고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이불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소위 말하는 '멍'을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저를 보고 있단 걸 알면 괜히 민망해질까 싶어 몰래 다시 거실에 앉아 기다리니, 수 분 있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그러면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힘껏 안아주며 묻는다. "이제 됐어~?"
딸은 "응"하며 방긋 웃는데 그때 보이는 미소가 너무나 행복해 보여 나까지 절로 즐거워진다. 그 짧은 거리두기 덕분에 우리 둘은 평화롭게 하루를 시작한다.
나와 녀석의 거리두기.
그 시간은 길어야 고작 5분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5분은 나와 녀석에게 꽤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먼저, 나에게는 아주 짧지만 강렬한 휴식을 주었다. 출산 후 한 번도 아이와 떨어져 있었던 적 없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와 함께 하는 일상이 디폴트 값이라고 여겼던 내게 아이가 깨어있는 순간 혼자 있을 수 있는 최초의 휴식이 된 것이다. 짧지만, 그래서 소중한 나의 시간이 생긴 것.
다음으로, 딸에게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오늘은 몸이 좀 찌뿌드드하네.', '꿈에서 괴물이 나와 너무 무서웠어.', '밥은 먹지 않고 간식만 먹을 순 없을까?'따위의 생각을 하며 제 경험치만큼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을 얻은 것이다. 4년 동안 한 번 갖지 못했던 녀석의 사생활이 생긴 것.
마지막으로, 딸과 나의 '미래'를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딸은 말이 트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양한 감정을 우리 부부에게 표현한다. 짜증 나, 속상해, 아쉬워, 피곤해, 좋아, 행복해, 슬퍼, 그리고 나랑 놀아, 자기 싫어와 같은 문장은 내가, 그리고 남편이 가르치기도 전에 저 스스로 담아낸 것들이다. 사소한 것에도 크게 느끼며 감정을 표현하는 녀석을 보며 언젠가는 아이 혼자만 있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줘야겠다 막연히 생각해오긴 했다.
그런데, 최근에 들이닥친 '거리두기' 사건으로 말미암아, 나와 딸의 미래가 좀 더 선명하게 그려진다. 아마도 딸은 내가 사춘기라 느꼈던 시기보다도 훨씬 빠르게 나와 정서적으로 독립하고 싶어 할 것 같다. 열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을 쓴다든가, '노크해주세요'라는 팻말을 문 앞에 붙인다든가, 친구들과 통화 중에 내가 들어오면 재빨리 전화를 끊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그러면 우리 부부는 아마도 그 모습을 존중해줘야겠지. 10대가 되면 언제나 셋이서 함께 해오던 일상을 조금씩 허물고 자신만의 일상을 확장해가는 딸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겠지. 누구나 겪을 미래를 조금 일찍 겪는 것일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반 강제적으로 시작된 '하루 5분'이 나쁘지 않다. 24시간 붙어 있어야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나로서는 아이가 벌써부터 잠시나마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찾는다는 게 도리어 반갑다. 또, 제가 찾은 시간은 오롯이 저를 위한 '사생활'로 존재하여 더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게끔 도와주니 나쁘다기보다는 좋은 쪽에 훨씬 가깝다. 게다가 나와 잠시 떨어져 있는 순간, TV가 없어도,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없어도 평온해하니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든다. 또 나는 나대로 나만의 시간을 아주 잠시라도 갖게 되어 좋다. 쓰던 글의 마지막 문장을 다듬을 수 있고, 보던 책의 마지막 문장을 마음에 새길 수 있다.
찰나가 주는 긴 만족.
오늘도 우리 모녀의 거리두기는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