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온 도시락이 싫었던 이유

by 안녕

주문한 지 이틀 후에 도착한 보온도시락은 생각보다 예뻤다. 은은한 노란색과, 분홍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외관과 깔끔한 가방과 젓가락까지! 이 한 세트가 50,000원이라면 약간 비싼 느낌이 들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또 왠지 모르게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중학생 때 엄마가 매일 아침 싸주던 보온도시락이 생각나며 괜히 90년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스테인리스로 따뜻함을 유지해주는 밥통과, 두 개의 반찬통. 그 옛날 엄마가 나에게 싸주었던 소소한 반찬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까지 했으니, 제대로 추억여행을 한 셈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이 신이 났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도시락 권태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날도 추워지는데 이제는 보온도시락이지! 갓 지은 쌀 밥을 넣고, 반찬을 담고, 그렇게 엄마가 해주었던 것처럼 내게도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랜동안 따뜻함을 유지해준다고 광고한 도시락이니 아마도 내일부터는 전자레인지의 도움이 없어도 따뜻한 밥 한 공기 먹겠다,라고도 믿었다.


물론, 대부분 맞아 들었다. 보온도시락은 명성에 맞게 제 역할을 해냈다. 저녁에 싸 둔 반찬들을 그 다음날 점심까지 잘 품어주었고, 맛도, 온기도 잘 유지해 주었다. 무게도 적절해서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내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특히 보온 도시락이 주는 '아날로그함', 아니 '예스러움'은 나의 마음을 채워주었다. 언제나 그리워하는 90년대 그 언저리 시절. 그 시절이 성큼 내게 다가온 것 같은 느낌. 기분. 그 감정이 얼마간은 힘이 되어 나를 지탱해 주었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보온'도시락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특징 때문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보온'도시락의 밥통은 내부가 스테인리스로 되어있다. 아침에 일어나 도시락을 싼다면 더할 나위 없는 장점이 된다. 갓 지은 밥을 담으면 최대 6~8시간까지 보온이 유지되니.


하지만 내게는 달랐다. 내가 따뜻한 밥을 먹기 위해선 남들과 달라야 했다. 평소보다 30분은 일찍 일어나야 보온 도시락의 장점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국을 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국과 찌개 같은 국물류가 있어야 밥을 먹는 특이체질인 내가 보온도시락을 사면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은 바로 '국물'이었다. 일반 도시락엔 국물을 담아가기 힘든데, 보온도시락이라면 알차게 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역시 기대와 달랐다. 일단 스테인리스 용기는 절대로 전자레인지 사용이 불가능하니, 따뜻한 국물을 먹기 위해선 결국 더 부지런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어제 만들어 놓은 김치찌개를 팔팔 끓여서 넣어야만 점심을 먹을 즈음에 미지근한(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애매한) 국물을 떠먹을 수 있었다. 결국 그 '미적지근함'을 맛보기 위해서 나는 적어도 4시 30분에서 5시 사이엔 일어나야만 했다.


평소보다 30분 이상 줄어든 수면시간은 가뜩이나 왕복 5시간 출퇴근 4년 차로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내 몸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쉬 피곤했고, 약간씩 짜증이 밀려왔다. 조금씩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래도 50,000원이나 들여서 산 좋은 도시락인데 이런 이유로 포기하긴 싫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달은 써봐야 하지 않나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 날, 남편을 위해 만들어 둔 닭곰탕을 담아 온 날이었다. 제대로 차려 먹자며 송송 썬 대파와 닭곰탕, 그리고 오이무침에 계란말이 따위를 싸 왔던 것 같다. 힘이 들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한다면서 거하게 챙겨 넣었다. 점심을 먹는, 휴게실이 유난히 썰렁하게 느껴져 카디건을 걸치고 밥을 먹기로 했다. 열심히 가져왔으니 열심히 먹어야 했다. 닭곰탕에 밥을 말아 꼭꼭 씹어 한 끼를 잘 먹었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아주, 길게, 오래, 아프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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