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서는 최선인
애석하게도 옮긴 직장엔 별다른 휴게 공간이 없다. 예전에는 휴게실 비슷한 나만의 공간에서 점심시간을 확보해 편하게 먹었는데 이곳은 흔하디 흔한 작은 휴게공간조차 없다. 혹시나 하고 가본 곳은 굳게 잠겨 있고 먼지가 자욱해 쓰지 않은지 한참 되어 보여 썩 내키지 않았다. 결국 사무실, 내 책상 위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가장 원하지 않았던,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 말이다.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뭐라고 하는 것처럼 주변 시선을 의식하는 나는, 도시락을 싸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먹은 적이 거의 없다. 10번 중 0.5회, 아니 0.1회 정도나 될까? 그 이유는 바로 '냄새' 때문이었다. 내게는 너무나 맛있는 반찬이고 국이지만 상대방에게는 그 냄새가 '지옥'이 될 수 있고, '비위'가 약한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냄새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한 냄새가 가득한 반찬을 싸온 날에는 귀찮더라도 꼭 휴게실에 가서 먹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라도 할지라도 먹고 나서는 꼭 환기를 해서 흔적을 지웠다. 혹시나 누군가가 그곳을 우연히라도 가게 되었을 때 냄새로 불쾌함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런데 이곳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사무실이 무지 큰 대신 그 안에 탕비실 용도의 물건들이 다 갖춰 있기에 밥을 먹으려면 결국 내 자리에서 먹어야 했다. 아무리 친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더라도 밥만큼은 꼭 독립된 공간에서 편하게 먹었는데, 그래서 도시락 싸기가 좋고 행복했는데 이곳에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첫 점심시간. 선뜻 도시락 뚜껑을 열지 못했다. 혹시나 냄새가 나면 어쩌지, 속으로 불편하다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게다가 점심시간도 10분이나 줄어 버렸다. 보통 1시간은 확보가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50분 안에 점심을 먹어야 했다. 그 마저도 중간중간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나면 시간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도시락을 싸와도 제대로 뚜껑 한 번 열지 못하고 그대로 냉장고, 혹은 가방 속으로 넣어버린 적도 꽤 있었다. 너무 바빴고, 또, 너무 눈치가 보였다. 타인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한 성격은 지독히도 나를 괴롭혔다. 결국, 며칠을 속을 텅텅 비운 채 집으로 와야 했다.
대안이 필요했다. 이렇게 살다 간 위염이 다시 생길 지경이었다. 습관을 못 고치고 하루에 한 잔은 꼭 커피를 마시고 있는 상황에서 빈 속으로 더 이상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런 음식은 없을까. 배는 채울 수 있지만 간단해야 하고, 냄새가 가능하면 적게 나는. 그런데도 매일 다채롭게 만들어볼 수 있는 도전적인!
주먹밥은 이 모든 것을 만족했다. 밥과 속재료만 있으면 뭐든지 가능했다. 참치마요 주먹밥, 김치 참치 주먹밥, 멸치 주먹밥, 계란 주먹밥, 진미채 주먹밥 그리고 소고기 야채 주먹밥 등. 동그랗게 말아 큼직하게 파 놓은 구멍에 갖가지 '소'를 넣고 동그랗게 모양을 낸 후 김가루를 묻히면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세계가 열렸다. 혹시 나하고 검색한 '유튜브'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레시피들이 넘쳐났다. 이른바 '주먹밥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만들기 쉬운 데다 먹기 편한 것도 큰 장점이었다. 찬밥 두어 그릇에 참기름, 그리고 맛소금을 더해 적당히 간을 맞추고 원하는 것만 넣으면 됐다. 어떤 것을 넣어도 보통 이상의 맛은 되니 냉장고를 털기에 딱이었다. 며칠 지난 반찬들을 잘게 잘라 밥 속에 넣으면 끝. 마침 간간하게 되어 많이 남은 멸치가 있어 멸치를 넣고 주먹밥을 만드니 썩 괜찮은 맛이 탄생했다. 지켜보던 다섯 살 딸내미도 조물조물 만들어 완성할 정도로 간단한 메뉴를 찾은 셈이었다.
먹는 것도 무지 편했다. 작은 도시락에 젓가락 하나만 있으면 끝. 적당한 크기로 10개 정도 싸가면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는 데다 냄새도 덜 나거니와 금방 먹을 수 있으니 시간에 쫓기지도 않았다. 국물이 흐를 일도 없었고 반찬을 집을 필요도 없었다. 한 두 개 집어 입 안에 넣고 오래 씹으면 체할 일도 없었다. 영양을 신경 써 만들기만 하면 남부럽지 않은 한 끼가 됐다. 더군다나 오미크론이 미친 듯이 퍼져가는 이 시점에 식당에 가서 많은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며 밥 먹는 게 너무나 부담스러운 내게, 점심은 간단히, 저녁은 푸짐히 먹는 게 좋은 내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새로운 메뉴였다.
그렇게 며칠을 주먹밥을 싸갔다. 물론 3첩 반상을 차려 먹으면 가장 좋지만, 국물을 사랑하는 나는 가끔 뜨뜻한 국물이 당기긴 하지만, 지금은 어쨌든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다. 무엇보다 남들 눈치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는 나를 정확히 알기에 지금은 '주먹밥'에 만족하며 한 끼를 든든히 채우려고 한다. 상황에 불만을 갖고 투덜대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과거에 미련을 갖지 말고 현재에 집중한 후 그에 맞게 변화하는 게 옳다.
지금 내게 최선은 '주먹밥'이다.
그 안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맛과 '에너지'를 채워 썩 괜찮은 한 끼를 만드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고 믿는다. 질리지 않고 끝까지 가야만 한다. 그러려면 끝없이 펼쳐지는 주먹밥의 세계에 지금보다 더 깊이 빠져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